
1.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
바울 사도가 빌립보서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그 어떤 지식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비교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지식이 존재한다. 철학, 과학, 문학 등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모든 학문과 정보의 총체를 떠올려보면, 이 지구 한 켠에 머물기에도 벅찰 만큼 방대함을 깨닫게 된다. “Knowledge is power”라는 서양의 오래된 격언도 있듯이, 지식은 곧 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가장 뛰어나고 고상한 지식은 바로 “주를 아는 지식, 복음”이다. 이는 단순히 지성이나 학문적 깨달음으로 설명될 수 없는, 영적인 지식이자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진리의 광채에 의한 것이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바울 사도의 고백을 깊이 묵상하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왜 고상한지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 그에 따르면, 이 지식이 고상하다는 것은 곧 모든 세상적 가치나 학문적 성취, 지적 호기심의 충족을 뛰어넘어 영원한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세상 지식은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유익할 수 있고, 때로는 그로 인해 명예나 재물을 얻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 지식은 죽음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반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에 동참하게 하는 능력을 품고 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이 세상적인 기준으로도 대단한 배경과 명예를 소유했음을 설명한다. 그는 베냐민 지파 출신이며, 할례를 팔 일 만에 받은 정통 유대인이었고, 율법적 의를 준수하기 위해 어떠한 열심을 보였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중 바울의 표현은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라는 말로 정리되는데, 이는 세속적으로 혹은 외적으로만 보아도 바울이 당대의 기준에서 상당한 자랑거리를 갖춘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나열하는 그 모든 업적과 배경이 얼마나 칭송받을 만한 것인지 당시 유대인 사회의 문맥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베냐민 지파는 전쟁에 용맹을 떨치던 지파였고,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호칭은 순수 혈통과 율법적 전통을 잘 지켜온 사람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칭호 중 하나였다. 율법에 관한 열심으로는 바리새인으로서, 그 수가 약 6천 명 내외였다고 전해지는 당대의 구별된 집단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외적 배경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얻은 것은 그리스도”라고 담대하게 고백한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긴다”라고 선언한다.
바울의 이 고백은 당시 교회 안팎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바울이 원래 차지하고 있던 지위나 명예, 그리고 누릴 수 있었던 종교적·사회적 특권을 모조리 버리고 떠난 모습이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전혀 후회 없이, 더 높은 차원의 지식을 얻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고 스스로를 변증한다. 이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 교회사가 증언하는 예화들을 종종 인용한다. 서구 열강이 몰랐던 시기, 멀고 먼 동방의 나라들—아프리카 대륙, 아시아 대륙, 혹은 남태평양 섬들—에 복음을 전하러 간 선교사들의 사례이다. 그들은 서양에서 높은 교육을 받았거나, 부유하거나,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배를 타고 위험한 바다와 낯선 문화권을 건너갔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그 놀라운 지식—복음의 진리—가 그 모든 것을 버릴 만큼 가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소중함을 온전히 깨달은 이들은 ‘버릴 수 있음’이 아니라 ‘더 큰 것을 얻었기에 버리는 것’이라는 역설을 체험한다. 장재형 목사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라고 선언했던 베드로와 요한의 고백을 들며, 우리에게도 “그리스도”라는 가장 고상하고 영원한 선물이 있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진정 복음을 붙들 때, 세상적 시선이나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자유롭게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최고의 가치로 칭송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깨닫기 전에는 율법적 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스스로를 흠 없는 자로까지 칭할 수 있었지만, 주님을 만난 후에는 그 모든 율법적 수고나 외적 배경이 전혀 무의미하게 느껴졌음을 고백한다. 왜냐하면 율법의 의는 도덕과 윤리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복음의 의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이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율법적 의보다 훨씬 크고 영원하다.
장재형 목사는 “내가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는 빌립보서 3장 9절 말씀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의 기본적 태도가 되어야 함을 여러 번 설파한다. 내가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발견해주시는 은혜의 수동태 속에 살아가는 것이 복음적 신앙이다. 우리는 스스로 의를 쌓거나 업적을 내세우며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존재다. 이 관점은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겸손하게 만들고, 또한 기쁨 가운데로 인도한다.
결국 바울은 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는 것이 그에게 인생 최대의 목표였고, 그 지식을 얻었기에 더 이상 세상적으로 유익하던 것들을 미련 없이 버릴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장재형 목사 또한 이 점을 다양한 설교와 강연에서 강조하며, 우리도 이 바울의 고백에 동참해야 함을 권면한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얻고도 영혼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예수님의 말씀(마16:26)을 인용하면서, 바로 그리스도와 복음이 우리에게 참된 생명과 기쁨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길임을 확증한다.
이 모든 배경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은 우리의 가치 체계를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인간적 기준에서 자랑하던 것들이 의미 없어지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임재 안에 거하는 것이 오히려 진정한 만족이 됨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는 바울이 경험했고 장재형 목사가 설교와 사역을 통해 거듭 상기시켜온 복음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복음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가장 큰 소망과 위로, 그리고 삶의 목적을 제공해준다.
2. 바울 사도의 생애, 율법의 의
빌립보서 3장 4절 이하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 사도가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가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렸는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울은 자신이 인간적으로, 육체적으로, 세속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 많았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내가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고 말하며, 다른 누구보다 뛰어난 성품과 업적을 자랑하기에 합당한 존재였음을 시사한다.
당대 유대 사회에서 태어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은 정통 유대인임을 표시하는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뿐만 아니라,베냐민 지파라는 출신도 매우 특별했다. 베냐민 지파는 ‘이리’라는 상징이 붙을 만큼 용맹하게 싸우고 끈질긴 전투력을 자랑하던 지파였다. 사울 왕 또한 이 지파 출신이었다. 바울이 본래 이름이었던 ‘사울(Saul)’을 사용했을 때, 그의 삶에 깃든 전통적 배경이 얼마나 화려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또한 바울은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으로서, 언어와 전통, 문화 어느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정통성을 지켜온 인물이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이러한 배경을 오늘날로 치환해 설명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에서 최고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저명한 스승에게 사사받았으며, 여러 전문 자격증을 가지고, 재정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자. 게다가 그 사람이 엄격하고 전통적인 신앙생활로 존경받는 종교 지도자라면, 그 자체로도 충분히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하다. 바울은 바로 그러한 지위를 가졌던 이였다. 그의 스승이 가말리엘이라는 점은 오늘날로 치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명성의 스승 아래서 학문을 배운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의 과거 업적과 배경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단언한다.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바울은“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다 해로 여길 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에 그 모든 것을 버렸다”고 고백한다. 이는 율법의 의로 자신을 무장했던 바울이, 믿음의 의를 알고 난 뒤에는 그전의 모든 기준이 무의미하게 느껴졌음을 보여준다.
율법의 의와 복음의 의는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율법적 의는 개인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느냐,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기준을 충족시켰느냐로 평가된다. 이 과정에서 흠없이 살려는 시도가 반복되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완벽할 수 없다. 오히려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괴로워하게 된다. 그러나 복음의 의는 “나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의의 전환을 “차원 이동”에 비유한다. 율법적 의의 차원에서 복음의 의의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한 규칙 집단에서 다른 규칙 집단으로 갈아타는 정도가 아니다. 인간의 자연적 능력으로는 결코 올라갈 수 없는 하늘의 차원, 곧 은혜의 세계에 초대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내가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발견한다는 능동태가 아니라, “발견되려 함”이라는 수동태를 쓴 이유는, 결국 스스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붙잡아주셨음을 고백하기 위함이다.
한편 바울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게 되고자 열심을 냈을 뿐 아니라,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섰다는 점도 강조한다. 그는 그것이 자신이 믿는 율법 전통을 지키는 올바른 열심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 옳다 여기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며 삶이 180도 바뀌었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는 빌립보서 3장 12절의 말씀은, 결국 그 충격적 만남 이후 바울이 걸어가게 된 험준한 사도적 여정을 상징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이러한 극적인 전환점을 ‘결정적 발견’이라고 부르곤 한다. 이전에는 율법적 잣대와 유대 전통을 절대시하며, 이방인들을 멸시하고 교회를 파괴해도 된다고 믿었으나,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그는 모든 구약의 율법과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율법적 의가 아닌 복음의 의를 붙드는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동시에, 자신이 박해했던 교회를 오히려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다. 이처럼 바울의 생애는 하나의 완벽한 반전 드라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반전 뒤에는 수많은 고난이 따랐다. 그가 선택한 복음 전도의 길은 매맞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는 길이었다. 바울은 2차, 3차 선교여행을 거치며 로마 제국 전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다. 그 어려운 와중에도 빌립보교회, 에베소교회, 고린도교회 등 여러 공동체를 개척했고, 편지로서 그들을 가르치고 권면하고 격려했다.
장재형 목사는 바울이 감당했던 고난이 단지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복음을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역설한다. 복음을 제대로 깨닫고자 하는 사람은 율법적 의로 자신을 드러내려 하기보다, 오히려 겸손하게 은혜를 의지하며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 한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다 보면 세상으로부터, 때로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나 핍박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고백함으로써, 우리의 소명이 선명해지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상급에 참여하게 된다.
결국 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던 자였지만, 그리스도의 길을 발견한 후에는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복음을 위해 종처럼 헌신했다. 이 삶의 태도가 바로 빌립보서 전반에 흐르는 주제이며, 장재형 목사가 오늘날 여러 교회와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해온 메시지이기도 하다. 율법적 의의 틀에서 한 치 앞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진정한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야말로 복음 사역자들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3. 부름의 상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바울은 부활의 권능과 고난의 참예를 말하면서, 궁극적으로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기 원한다고 밝힌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라는 이 표현은 바울의 신앙의 정수를 보여준다. 그의 목표는 단지 율법의 표준을 충족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본받아, 고난 속에서도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려고 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부분을 설교할 때, “고난의 길은 결코 달콤하지 않지만, 부활의 권능이 약속되어 있다”는 점을 자주 언급한다.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 것은 때로는 세상적 기준으로 볼 때 실패처럼 보이고,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며, 고통스러운 순간을 동반한다. 그러나 그 길 끝에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면류관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9장 24-27절에서 경주하는 자의 비유를 들어 설명한다. 운동장에서 뛰는 이들이 상을 얻기 위해 절제하며 최선을 다하듯, 그리스도인도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달려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빌립보서 3장 12-14절에서 바울은 그것을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리고 이어서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표때를 향해 달려간다”고 고백한다. 이는 바울이 현재의 신앙 상태에 안주하거나 과거 성취에 매달리지 않고, 앞으로 닥쳐올 영광을 향해 늘 전진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장재형 목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제가 주어진다고 말한다. 과거의 영광이나 상처에 사로잡히면, 미래로 나아갈 동력을 잃어버린다. 교회가 외형적으로 부흥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만족하고 머무르면 안 된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신앙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으려 한다면, 신앙은 정체되고 만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는 바울의 결단은, 바로 이런 안주나 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신앙적 결심이다.
이때 표때, 곧 목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다. 이 상은 세상에서의 칭찬이나 명예, 물질적 보상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생명과 영광이다. 야고보서 1장 12절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고 말한다. 또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 주님은 서머나 교회에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하신다.
바울의 경우, 이 상을 향해 달려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종의 모습을 취했다. “내가 자유하였으나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스스로 종이 되었다”는 고린도전서 9장 19절의 말씀처럼, 그는 복음을 위해 개인적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기도 했다. 이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으로 희생과 헌신을 감수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바울의 ‘이중성’을 “영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랑을 위해 종이 되는 역설적 삶”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이 역설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끌어안아야 하는 부름이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잡힌 자이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를 잡으려고 열심히 좇아가는 경주자다. 이미 은혜로 구원받은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계속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여정을 걸어간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이 편지에서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는 표현은, 빌립보 성도들이 내부 분쟁과 갈등으로 흔들릴 때 그들의 시선을 다시금 영원한 목표에 고정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생각과 수준, 신앙의 깊이가 공존하기 마련이다. 바울은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라, 만일 무슨 일에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그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고 말하며, 모두가 다 같은 경지에 있지 않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동일한 상을 향해 달려가야 함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는 바울의 말씀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실천 원리로 제시한다. 신앙의 성숙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느 단계에 있든, 그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한 걸음씩 더 나아가려는 태도다. 아예 믿음이 없는 상태라면, 믿음을 가지고자 노력해야 한다. 믿음이 싹트고 있는 단계라면, 그 믿음을 실제 삶에 적용해보며 성장해야 한다. 어쨌든 “온전히 이르렀다” 여기지 말고, 과정을 지속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메시지는 현대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수많은 교회들이 역사 속에서 부흥과 쇠퇴, 분쟁과 화합을 반복해왔지만, 결국 우리가 바라봐야 할 궁극적 표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다. 이 표준을 놓치면, 교회는 인간적인 분쟁이나 자기 자랑에 빠지게 되며,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기 쉽다.
결국 바울이 “내가 달려가노라”고 말했듯이, 우리도 “달려가는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장재형 목사가 현대 교회를 향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사명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미 많은 것을 이뤘다고 스스로 안주하는 순간, 실제로는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믿음 생활이 “습관”이나 “전통”에 묶이게 될 때, 더 이상 복음의 역동성이 나타나지 않는다. 복음은 현재진행형의 능력이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는 편지를 썼고, 그의 영향력은 쇠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도 교회 안에서 또는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 여러 고비를 맞이할 수 있다. 사업 실패나 대인관계에서의 어려움, 혹은 몸의 질병 등 다양한 현실적 문제를 마주할 때, 때로는 왜 이런 길을 가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바울의 삶을 돌이켜보면, 그는 로마 시민권자임에도 핍박을 받고, 유대 종교지도자 출신임에도 자기 민족에게 배척당했으며, 전도 여행 중에 수많은 사고와 배신, 위험을 겪었다. 그럼에도 후회 없이 “더 큰 상”을 바라보며 살았다.
이것이 바로 “부르심의 상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 여정”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여정을 설명할 때, 우리도 각자 받은 소명이 있다고 말한다. 소명은 단지 목회자나 선교사만의 몫이 아니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처한 자리에서 복음의 빛을 발하는 삶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가정에서, 어떤 사람은 직장에서, 또 어떤 사람은 교회 봉사나 사회봉사를 통해 주어진 소명을 감당할 수 있다. 그것이 각자의 ‘경주 코스’다. 그리고 그 코스를 달리다 보면 지칠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끝까지 뛰는 자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면류관”이라는 사실이다.
결국 빌립보서 3장은 바울의 개인적 고백이면서도, 모든 시대와 지역의 교회에 유효한 복음적 권면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말씀이 오늘날 무디어진 신앙을 재차 일깨우는 영적 촉매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라는 바울의 말처럼, 우리 신앙도 항상 배움과 성장의 과정에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한다면, 반드시 하나님이 예비하신 놀라운 은혜와 상급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진리에 대한 증언이자 변증이며, 동시에 장재형 목사가 전해온 현대 교회를 향한 메시지다. 어떤 사람도 이렇게 풀 수 없고, 어떤 지식인도 이렇게 설명하기 어려운 복음의 심오함을, 바울은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다. 그 삶의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날 교회 역시 “주께서 우리를 발견하실 때까지, 우리가 주님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경주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할 때, 교회는 아무리 먼 길을 걸어가도 지치지 않고, 복음이라는 빛으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환하게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늘 이 원리를 잊지 말라고 거듭 상기시킨다. 우리 안에 진정한 동력이 되시는 분은 그리스도 예수이시고, 우리가 붙들어야 할 표대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다. 과거의 실패나 상처에 머물지 말고, 또 이미 누린 성공이나 특권에 스스로 자족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교회가 분쟁과 오해, 갈등에 빠질지라도, 이 시선을 잃지 않고 “한 마음으로 한 길을 향해” 간다면, 반드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영광의 날이 임할 것임을 확신한다. 이것이 바울이 걸어간 길이며, 그를 계승하고자 노력해온 장재형 목사의 간곡한 권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