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광야의 여정과 7년의 의미
히브리서 4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말씀은 안식에 대한 심오한 가르침을 담고 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3)라는 이 구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안식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안식에 참여하는 자들은 누구인지가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말씀을 토대로, 우리의 신앙 여정 속에서 ‘광야를 지나고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달리, 믿음을 지키고 복음을 붙들어 끝까지 달려가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안식이 있음을 강조해 왔다. 그 안식의 실제적 의미는 단지 육체적 쉼이 아닌,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참된 평강이다.
이 주제는 본문에서 언급된 ‘믿음과 순종’의 중요성과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광야에서의 불순종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히 3:19)을 예로 들며, 우리에게 동일한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 것을 강권한다. 그런데 이 본문이 특별히 강조하는 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는, 이전의 제도나 율법을 넘어서는 거룩한 안식이다. 모세나 여호수아가 이끄는 차원의 땅(가나안)이나 휴식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얻게 되는 구원과 영원한 휴식이 핵심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진정한 안식은 예수님을 만날 때, 그분의 보혈을 통해 죄 사함을 얻을 때 비로소 시작된다”고 역설했다.
시편 95편 8절 이하에서 “므리바에서와 같이,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라고 기록된 대목은, 출애굽기의 사건들을 상기시키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출애굽 백성들이 물이 없다는 이유로 불평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며, 심지어 지도자인 모세에게까지 원망을 쏟아냈던 장면이 떠오른다.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던 이들이, 광야에서 생명의 은혜를 받고도 그 감사함을 금세 잊고 불만과 혈기로 되돌아가는 모습은 신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큰 경종을 울린다.
놀라운 점은, 그런 백성들의 불평과 반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 그들을 살리셨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하여 모세는 자신의 혈기를 드러내게 되었고(민 20:10-12), 결국 약속의 땅에 직접 들어가지 못하는 결과를 맞이한다. 히브리서 3장과 4장은 이를 상세히 언급하며, 불순종과 완악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에 주목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는 백성들의 불평이든, 지도자의 혈기든 모두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이라고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핵심 포인트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7년’이라는 시간은 성경에서 여러 상징으로 등장하는 ‘7’이라는 수와 자연스럽게 맞닿아 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7일째에 안식하셨다. 안식일(Sabbath)의 기원으로서 ‘7일째’가 주는 의미는 단순한 숫자를 넘어 창조와 피조물, 그리고 구속의 역사를 관통하는 매우 심오한 주제다. 장재형목사는 일찍이 “우리 신앙에도 이러한 ‘영적 7일’의 의미를 적용할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하며, “우리가 현실에서 겪는 삶의 싸움과 노고는 ‘6일’ 동안의 노동에 비유될 수 있고, 그 6일의 시간이 끝날 때 비로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진정한 안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역설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7년’이라는 여정은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을까? 본문의 설교에서는 “지난 7년 동안 우리는 정말로 안식할 수 없었던 세월을 보냈는데, 이제 금년 7년째를 통해서 우리가 안식을 얻게 되었다”는 고백이 등장한다. 이는 마치 광야의 시간을 지나 드디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실제로 삶의 광야 같은 시간을 지나며, 그 가운데 수많은 시험과 역경이 있었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힘겨운 일들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는 ‘믿음의 증언’인 셈이다.
특히 이 과정 속에서 강조되는 것은 ‘불평하지 않았다는 점’과 ‘혈기를 내지 않았다는 점’이다. 광야를 걷는 동안 부족함이 있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인간적으로 볼 때는 충분히 낙심하거나 원망할 만한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감사와 찬양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출애굽기의 백성들 역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극적으로 해방된 후,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고개를 돌려 과거를 그리워했다. 이처럼 인간은 쉽게 변하고 쉽게 흔들린다.
하지만 그 시련의 시간들을 묵묵히 이겨내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그 방법이 ‘복음’이라는 사실이 이 설교의 중요한 핵심 메시지다. 복음이 없었다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확신이 없었다면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금세 한계를 맞이했을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많은 말씀을 깨달았기에 이긴 것이 아니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역사했기에, 우리로 하여금 불평을 이기게 하고, 혈기를 제어하게 하고, 감사의 마음을 지속하게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십자가의 능력이야말로 신자에게 주어지는 궁극적인 힘임을 분명히 일깨워 준다.
이 ‘광야의 여정’을 7년으로 비유했을 때, 그 출발점은 어쩌면 아무것도 없던 맨해튼 6 바클레이 거리에서의 시작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전혀 다른 지점이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곳이 ‘광야 같은 자리’였다는 사실이다. 재정적으로나 인력적으로나, 혹은 환경적으로나 전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시작된 모든 사역과 움직임을 감당해 나가면서, 자주 인간적인 두려움도 생기고, 실패할 것만 같은 위기도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때마다 오직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과, “주님이 말씀하시면 된다”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었다고 고백하는 간증이 이어졌다.
그러나 7년이라는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이지만, 분명한 것은 그 기간 동안 광야를 함께 걸어온 사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오늘 설교에서 거듭 강조된 “여러분은 모세의 백성과 같지 않았다. 불평하지 않았고 혈기를 부리지 않았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이를 묵상하며 이겨냈다”는 부분이다. 이는 히브리서에서 보여 주는 ‘믿음과 순종’의 모델을 따라간다는 의미이며, 곧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안식을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결단의 표징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은 단순히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전한 안식은 하나님이 일하시는 현장 속에서 그분의 인도하심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자들이 누리는 영적 평안에 가깝다. 느헤미야 6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끝났을 때, 주위의 이방 족속들이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느 6:16)라고 고백했던 장면이 마치 그 예증이 된다. 모든 대적이 낙담하였다는 것은, 그토록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강력한 증언이었다. 이는 7년을 걸어온 광야 여정이 이제 안식으로 이어지는 이 상황과도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셨음을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분의 이름이 높아지고 자연스레 찬양과 감사가 터져 나온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원리에 대해, “하나님의 역사에는 사람의 어떠함이 크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의 공로나 자랑할 만한 요소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모든 일이 완성된다”고 누차 강조해 왔다. 동시에, “그 은혜를 붙잡고 나가는 이들에게는 반드시 안식이 주어진다”는 사실 역시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 진리로 제시했다. 이는 구약의 출애굽 사건에서도 나타나지만, 더욱 완전한 형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다.
광야 같은 시간 동안 왜 우리는 화내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혈기를 부리지 말아야 하는가? 그것은 결국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교만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순응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마음속에 계속해서 불평과 분노가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안식을 맛볼 수 없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불평과 분노를 억누를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능력 없이는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열매 맺게 하실 때 비로소 우리는 참 안식에 들어갈 준비가 된다.
“우리의 영적인 광야 7년”이 지난 뒤 맞이한 이 ‘안식의 때’는 신앙 공동체에게도, 또 개인의 신앙 여정에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그것은 단순히 “이제 쉬자”라는 육체적 해방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다음 단계 사역과 길을 힘 있게 걸어갈 수 있는 ‘재충전의 시간’이다. 예수님 안에서 주어지는 안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만, 동시에 미래를 위한 준비와 다음 사명으로 향하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많은 경우, 안식은 앞선 고난을 통해 더 빛난다. 광야를 거치지 않았다면 안식의 달콤함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7년간의 광야 생활을 통해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컸는가, 복음이 얼마나 나를 지탱해 주었는가”를 체득하게 된다. 이로써 주님이 다시금 새로운 일터,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사역의 장으로 우리를 불러가실 때,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가나안 땅은 약속의 성취지이자 또 다른 영적 싸움터”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을 취해야 했던 것처럼, 신자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동시에, 여전히 세상 속에서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한다. 그러나 그 출발이 하나님 안에 있기에, 그리고 그 영적 전쟁의 본질이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와 동행한다’는 사실이기에 우리는 담대해질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안식을 누리는 태도’가 결국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사명을 함께 이루어 가는 길이라고 설교는 말해 주고 있다.
이처럼 ‘광야의 여정’은 성경 역사 속에서도, 개인의 신앙사에서도 반복되는 중요한 주제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출애굽 사건을 두고 “이 일은 거울이 되어,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기록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히브리서 기자가 강조하는 내용과도 동일한 맥락이다. “그들이 들어가지 못한 안식을 너희는 들어가라.”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가 그들과 달리 더 의롭다”는 주장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실패를 교훈 삼아, 믿음과 순종 안에서 끝까지 걸어가야 한다”는 메시지다. 그리고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오늘 설교에서는 “불평한 사람들은 결국 이 땅에 함께 들어오지 못했다. 그러나 복음으로 함께 걸어온 우리는 들어왔다”는 고백이 강조되었다. 이 차이는 결국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붙든 자’와 ‘붙들지 않은 자’의 차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신뢰해야 했던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 그분 안에서 성취될 약속을 믿고 걸어가는 자들은, 설령 광야를 만나도 불평과 혈기로 자멸하지 않는다.
시편 66편 16절에서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는 지금까지 걸어온 7년간의 역사를 되돌아볼 때, 인간의 공로나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숱한 기적과 열매들을 발견한다. 그런 경험은 우리가 앞으로 맞닥뜨릴 또 다른 7년, 아니 그 이상의 영적 싸움에서도 변치 않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사역의 현장이 어디든, 광야가 다시 펼쳐진다 해도 하나님께서 이끄실 것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매일의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지속적으로 강조해 온 ‘영적 광야와 안식의 원리’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참된 쉼과 구원’을 드러내는 증거다.
2. 복음의 능력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
히브리서 4장 후반부(4:12-13)에 이르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라는 강력한 선포가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의 위력을 확인한다. 흔히 설교나 성경 공부에서 이 구절을 인용할 때, 그 초점은 주로 “말씀이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내면을 꿰뚫어 보신다”는 데 맞춰진다. 그러나 장재형목사는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단순한 지식 전달용이 아니다. 우리에게 구체적인 실천과 승리를 가져다주는 살아 있는 무기”라고 역설한다.
그렇다면 ‘어떤 승리’를 말하는가? 바로 우리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죄, 두려움, 불평, 혈기, 미움 등의 모든 악한 요소를 몰아내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참된 자유와 안식을 누리는 승리를 의미한다.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할 때,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 스스로를 성찰하게 된다. “내가 지금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불평하는 근저에는 어떤 불신이 자리 잡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진지하게 던질 수 있게 되며, 동시에 그러한 죄와 약점을 회개함으로써, 점차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 내는 근본 동력은 복음에 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완성된 구원의 소식이며, 모든 믿는 자들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는 능력이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복음의 본질을 붙든다면, 어떠한 광야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힘과 소망을 얻게 된다”라고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정체성이 새로워진다는 사실과도 연결된다. 죄인에서 의인으로, 심판받을 자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뀐 우리는, 더 이상 이 땅에서의 고난과 역경 앞에 절망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고난을 통해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체험해 가는 여정을 걷게 된다.
광야가 계속될 때, 혹은 불확실하고 험난한 환경에 처해 있을 때, 사람은 누구나 쉽게 지치거나 포기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불평이나 원망, 혹은 다른 누군가에 대한 탓으로 돌리는 태도도 흔히 나타난다. 그러나 진정 복음을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자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한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안식에의 초청’이다.
히브리서 4장 3절에서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라고 선언할 수 있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나 감정적 수용을 넘어, 우리 삶 전체를 그분께 맡긴다는 의미다. 그것은 때때로 모세의 광야처럼 혹독한 길일 수도 있지만, 그 여정의 끝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안식이 기다린다. 장재형목사는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가 바로 복음이며, 그 복음을 믿고 살아내는 삶이야말로 성도가 지향해야 할 길”이라고 수없이 강조해 왔다.
복음의 능력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히브리서 기자가 “운동력 있는 말씀”이라고 표현했듯이, 말씀은 그 자체로 영적인 움직임을 갖고 있다. 이는 수동적으로 읽히는 문장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을 뒤흔들고 삶의 방향을 바꾸게 만드는 적극적인 힘이다. 예컨대, 시편 95편에서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실제로 하나님 음성을 들었을 때, 즉 성령을 통해 이끌림을 받을 때, 마음을 열고 순종해야 함을 촉구한다.그 음성에 불순종하면 광야의 백성처럼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상황이 재현될 수 있음을 경고해 준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아무리 말씀이 능력 있고 예리해도, 내가 그 말씀을 거부하거나 듣기 싫어하면 소용이 없다는 점이다. 말씀은 우리를 찌르고 쪼개지만, 그때 우리가 양심의 찔림을 받으면서도 돌이키지 않는다면, 결코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복음의 능력과 말씀이 가진 운동력은 우리의 열린 마음과 순종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순종마저도 인간의 의지나 선행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성령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그래서 결국 안식으로 가는 길의 출발이자 완성은 그리스도께 달려 있게 된다.
복음 안에서의 승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광야를 지나는 중간 중간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하고, 그런 체험이 반복될수록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확신이 더 깊어진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도 바울이 “우리 조상들이 모두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라면서 출애굽 사건을 되짚을 때, 그 목적은 과거 사건을 박제하듯 기억하라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사건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을 재확인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은, 그 광야 여정에서 배운다. 불평 대신 찬양을 선택하고, 혈기 대신 온유함을 택하며, 불신 대신 믿음을 드러내는 태도가 쌓일 때 비로소 안식의 문은 활짝 열리게 된다. 이것이 가능하게 하는 열쇠가 복음이고, 그 복음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 바로 교회 공동체다. 오늘 설교에서 언급된 것처럼, “우리 교회, 우리 지체들은 광야 길을 함께 걸으며 불평하지 않았고, 결국 들어왔다”고 하는 데서 공동체적 안식의 의미를 엿볼 수 있다.
교회는 수많은 개인이 모여 이룬 집합체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하나의 ‘몸’이다(고전 12장). 따라서 복음의 능력은 ‘개인’에게만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며 같이 믿음의 길을 걸을 때, 그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와 갈등조차도 복음 안에서 녹아들어 거룩한 결실을 맺게 된다”고 가르쳐 왔다. 이는 안식으로 가는 길이 개인적 차원을 넘어, 공동체적 실천을 통해서도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안식에 도달했을 때, 그 기쁨은 또 다른 사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느헤미야 6장의 경우, 성벽 건축이 마무리되자마자 모든 대적이 두려워하고 낙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결과이며, 동시에 백성들이‘완성된 성벽’이라는 안식의 실체 앞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갈 준비를 하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오늘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7년의 고난을 통과해 이제 안식을 맞이했을 때, 그 안식은 과거의 고생을 단숨에 잊게 하는 위로가 될 뿐 아니라, 앞날에 대한 담대한 비전을 갖도록 만드는 발판이 된다.
안식을 맞이했다고 해서 앞으로 어려움이 전혀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사실 신앙생활은 끊임없는 영적 전투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한 번 맛본 안식의 달콤함, 그리고 그 안식을 주셨던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이후 어떤 폭풍이 몰아쳐도 견뎌 낼 힘이 된다. 복음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다(롬 8:35-39). 안식의 경험은 그 사실을 직접 체험하게 만들며, 때문에 더욱 믿음의 근육을 단련시킨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붙들 때, 궁극적으로 승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는 헛된 낙관주의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보장된 승리에 근거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셨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기에, 그분 안에 거하는 자들은 이미 승리를 약속받은 상태다. 안식은 그 승리의 열매이며, 또한 승리의 과정 속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샘물 같은 쉼터이기도 하다.
문제는 우리가 그 복음을 얼마나 날마다 붙들고 살아가느냐이다. 오늘 설교에서 “우리가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그 모든 일을 말씀의 힘으로 한다”고 선언했듯이, 말씀이 우리 발걸음을 인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금방 인간적인 계산과 욕망에 빠지게 마련이다. 반면, 말씀을 따라간다면, 어떤 환경에서도 불평이나 혈기에 휩쓸리지 않고, 광야에서도 초자연적 공급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셨듯이, 오늘날에도 우리 삶 속에 기적을 베푸실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적은 늘 ‘하나님께서 하셨다’는 고백을 이끌어낸다. 느헤미야 시대에 적들이 두려워했던 이유도, 이스라엘의 백성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들 배후에 계신 하나님 때문이었다. 이처럼 복음의 능력으로 안식을 누리는 공동체는 그 자체로 세상 사람들에게 강력한 증언이 된다. “어떻게 저들은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가? 어떻게 저들은 불평과 분노 대신 찬양과 감사를 선택하는가?” 하는 의문은 곧바로 “그들은 복음으로 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라는 답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복음의 능력을 실제로 경험하는 삶은, 개인적 간증을 넘어서 공동체적, 나아가 선교적 효과를 발휘한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거나 오해한 채 살아갈 때, 교회 공동체가 보여 주는 ‘안식의 표본’, ‘승리의 증거’는 그들에게 복음을 알 수 있는 길을 터준다. 이로써 우리는 더 큰 사명, 곧 ‘온 땅에 복음을 전하라’(마 28:18-20)는 지상명령을 감당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승리는 히브리서가 말하는 안식의 약속과 맞물려 있으며, 그 안식은 완전한 구원과 연결된 ‘영원한 쉼’이자, 동시에 날마다의 삶 속에서 경험하는 ‘현재적 안식’으로도 드러난다. 복음은 바로 그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셨듯이, 이 약속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들에게 유효하다.
장재형목사가 평소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보혈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매일의 삶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해 온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복음이 삶을 바꾸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광야 속에서 불평을 되풀이하거나 혈기를 부리며 모세의 백성처럼 쓰러질 수 있다. 하지만 복음에 사로잡히고, 말씀에 의지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구할 때, 우리는 반복해서 넘어지는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안식과 승리의 길을 걷게 된다.
오늘 설교의 결론은 “모세나 여호수아보다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안식으로 초청하신다. 히브리서 기자가 보여 준 역사적 교훈을 잊지 말고, 출애굽기의 광야 사건이나 시편 95편이 주는 경고를 마음에 새기며, 복음에 붙들려 살라”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단순히 한 순간의 위로가 아니라, 신앙 여정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원리다. 그리고 7년의 광야를 지나온 이들의 간증이 그것을 뒷받침해 준다. “우리는 이겼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셨기 때문이다”라는 고백이 모든 신자의 가슴에 울려 퍼지는 한, 그 무엇도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안식을 빼앗을 수 없다.
장재형목사가 누차 선포하듯, “모든 공로는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그저 그 은혜에 감사하며 날마다 복음으로 살 뿐”이라는 결론이야말로 히브리서 4장이 주는 가장 감동적인 메시지 중 하나다. 이는 곧 미래에도 적용될 영적 원칙이다. 7년을 이겼다면, 또 다른 7년도 가능하다. 아니, 70년이나 700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진리가 여기에 있다. 복음은 영원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안식은 우리의 믿음으로 취해지는 실제다. 이 진리를 붙들고, 매일 새롭게 거듭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특권이다. 그 누구도 대적하거나 빼앗을 수 없는 이 안식이, 바로 오늘 우리가 누려야 하고 전해야 할 복된 소식임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