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죄와 심판에 대한 공평성: 이방인과 유대인, 그리고 오늘의 교회
로마서 2장은 ‘이방인들에 대한 진노’를 다룬 로마서 1장에 이어, ‘유대인에 대한 진노’를 본격적으로 다루는 장이다. 바울은 1장에서 이방 세계의 죄악상을 고발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여 음행과 불의, 탐욕과 우상 숭배로 가득 찬 삶을 살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 위에 임한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2장에 이르면 갑작스레 화살이 유대인에게로 돌아온다. 그들은 자신들을 선민(選民)이라고 자부하면서, 이방인이 받는 하나님의 심판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바울은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롬 2:1)라고 선언한다. 즉, 유대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정죄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동일한 죄를 범하는 자들’은 변명의 여지 없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서 “영적 교만과 스스로 의롭다 여기는 태도는 유대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날 교회를 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해당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복음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교회 안팎의 사람들을 가르치고 판단할 때가 많다. 그러나 동시에 내면을 살펴보면, 그들보다 더한 죄가 없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예수님께서도 산상수훈(마 7:1-2)에서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도 비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결국, 죄와 심판에 있어서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가 동일한 기준 아래 놓여 있으며,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편애하지 않으시며, 혈통이나 종교적 제도, 종교적 열심만으로 죄의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이 맥락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의 자부심의 근거인 ‘율법’과 ‘할례’를 향해 깊이 파고든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자신들에게 주어졌고, 육체적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여겼기에, 이방인과는 구별된 삶을 산다고 자랑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롬 2:13)라고 선포하며, 단지 소유나 형식적 준수로는 의롭다 인정받지 못함을 못박는다. “마음의 할례”가 없고 “회개가 없는” 종교적 자부심은 오히려 죄와 심판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육신의 할례가 있어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무할례자가 되고, 반대로 무할례자가 율법의 정신을 지킨다면 할례자보다 낫다”고 강조한다(롬 2:25-27).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논지를 오늘날 교회의 현실에 적용한다. 교회를 다니고 세례를 받았으며, 예배드리고 직분을 맡고, 때로는 헌신과 봉사에 열심이라 할지라도, 정작 말씀의 본질인 ‘사랑, 자비, 용서, 거룩’을 자신의 삶에서 철저히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행위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나는 예배에 빠지지 않는다. 나는 십일조를 한다. 나는 교회 안에서 열심히 헌신한다”는 외적 신앙이 곧 내면까지 의롭다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사람에게서 칭찬을 받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외모나 형식에 치우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신다”(롬 2:11)는 바울의 선언은, 과거 유대인만이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모든 신앙인의 가슴을 두드리는 경고다.
더 나아가 바울은 이방인들이라도 ‘양심’을 따라 선을 행하려 애쓰는 자들이라면, 실제로 율법이 없어도 스스로 양심의 법을 지키는 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롬 2:14-15). 인간의 양심은 창조 때부터 내재된 ‘본성적 율법’이므로, 그것으로도 죄를 분별할 수 있다. 즉, “나는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았으니 몰랐다”라는 식의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 안에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본능이 있고, 그 법을 어길 때면 ‘자기 고발’과 ‘내적 정죄’를 경험한다. 결국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혹은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자든 그렇지 않은 자든, 누구나 하나님의 공평한 심판 아래 선다는 것이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복음은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고 회개로 초청해, 마침내 은혜와 용서 안에 살아가게 하는 힘”이라 역설한다. 그러나 그 은혜가 ‘죄를 계속해서 지어도 괜찮다’는 방종이나 자기합리화로 이어지면 안 된다. 오히려 은혜가 ‘내가 죄를 뉘우치고, 선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도록 도전하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
결국 로마서 2장이 보여주는 핵심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 앞에서 예외가 없으며, 둘째, 율법 자체나 어떤 종교 의식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의 순종이 요구되며, 셋째, 그 모든 판단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공의 아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를 적용할 때, 오늘날 교회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장재형 목사도 “자신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두려워하라”(고전 10:12) 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늘 자신을 성찰하고 회개하며,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해야 함을 거듭 강조한다.
2.영적 교만과 회개하지 않는 고집: 믿는 자에게 더 엄중하게 임하는 경고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라고 호되게 꾸짖는다(롬 2:1).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인식이 지나치게 강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설령 죄를 범한다 해도 궁극적으로는 구원받을 것이라는 막연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의지하던 외경(위경) 가운데 ‘솔로몬의 지혜서’에서도 “하나님은 인자하시고 참으시며 자비가 풍성하셔서, 그의 자녀들은 결국 구원하신다”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자신들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석하면서, ‘우리는 어떠한 죄를 지어도 끝내 구원받는다’는 식의 ‘영적 특권의식’을 형성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이러한 병리적 현상이 충분히 발견될 수 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두고 “영적 교만과 자기확신이 지나치면, 결국엔 회개하지 않는 고집으로 굳어져버리는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한 상태에 빠지면, 자신의 삶과 마음 속에 틈타는 죄를 통렬히 인정하기보다는,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괜찮다’거나 ‘그래도 나는 교회 안에서 열심이 있다’고 자위하게 된다. 이런 태도를 예수님은 누가복음 18장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통해 명확히 고발하셨다. 그 비유에서 바리새인은 “하나님, 내가 이방인이나 죄인과 같지 않고, 금식과 십일조도 한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가 오히려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며, 바리새인의 ‘자아의’(自我義)를 책망하신다. 바리새인에게는 경건의 ‘형식’은 있었지만, 그 안에 실질적인 사랑과 겸손이 없었다. 세리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만을 의지하는 ‘영적 가난’이야말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태도이자 회개하는 마음이다.
“영적 교만”의 극단적 모습은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으로 드러난다(롬 2:5). 바울은 이것이 유대인들 안에 만연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종교적으로 많은 특권과 지식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마음 깊숙이 자리한 죄성을 인정하지 않고, 남을 판단하는 데만 능했다. 동시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하심을 오용하여, ‘더 죄를 져도 용서받을 것’이라는 안일함으로 흐른 것이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인자하심, 용납하심,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한다”(롬 2:4)고 표현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자비가 분명히 있지만, 그것은 죄를 방치하고 죄에 안주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죄에서 돌아설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오래 참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안에 늘 자리하기 쉬운 이러한 자기 기만적 태도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예배와 봉사, 헌신은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생활의 모습이지만, “나는 이 정도면 괜찮아”라는 생각이 스며드는 순간, 영적 교만으로 빠지기 쉽다. 특히 현대교회는 조직이 방대하고 체계가 잘 잡혀 있어, 어느 부서에서든지 열심히 활동하다 보면 스스로를 의롭다고 착각하기가 쉽다.
또한 바울이 말하는 ‘회개하지 않는 고집’(롬 2:5)은, 심지어 죄를 지적받고도 인정하지 않고 변명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내가 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라며 자기 행위를 정당화한다면, 내면의 성찰과 죄의 고백이 가로막힌다. 한편, 일부 교인들은 “그래도 나는 남들보다 낫다”며 상대적 우월감을 갖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은밀한 것까지 심판하시는 분이다(롬 2:16). 예수님께서 “보는 자들을 맹인 되게 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러 오셨다”(요 9:39-41)고 하셨을 때, 함께 있던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맹인이냐?” 하고 되물었다. 예수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다면 죄가 없겠지만,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말씀하셨다. 즉, 자기 허물을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고 착각하는 자들의 죄가 가장 심각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어쩌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보다 죄에 대한 두려움이 더 무뎌진 상태일 수 있다.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고, 나는 이미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라는 이유로, 정작 죄를 미워하고 회개하기보다는, 번번이 넘어질 때마다 ‘괜찮을 것’이라고 치부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바울의 논지는 분명하다. “너희의 고집과 회개치 않는 마음으로 인해, 진노가 쌓이고 있다.”(롬 2:5)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 분명함에도, 그 사랑과 자비를 ‘죄를 반복하기 위한 방패’로 삼는 것은 심각한 불경건이며, 언젠가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장재형 목사는 “회개란 단순히 죄를 자백만 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 죄성을 통렬히 깨닫고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이라 가르친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가 ‘나를 도덕적으로 해이해지게 만드는 면죄부’가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혜 안에 서야 하지만, 그 은혜에 안주하거나 교만해지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급격히 퇴보한다”는 점을 잊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로마서 2장이 “믿는다고 하는 자들”을 더 심각하게 고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음을 소유하고, 교회를 섬기며, 하나님을 안다고 자부하는 이들에게는 사실 더 큰 책임이 따른다. 따라서 남을 정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피고,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결단과 성령의 도움을 간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된다.
3. 마음의 할례와 참된 순종: 율법의 본질과 신앙의 내면화
로마서 2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과 ‘이면적 유대인’을 대조한다(롬 2:28-29).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여기서 ‘유대인’이라는 표현을 오늘날로 확장해 ‘교인, 성도, 혹은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 자’로 바꿔볼 수 있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교적, 세례 증서, 혹은 종교 의식이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고 마음으로 주의 뜻을 좇는 자가 참 성도라는 뜻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구절을 두고 “신앙의 본질은 반드시 내면의 할례, 곧 마음의 변화를 요구한다”고 거듭 가르친다. 유대인들은 언약의 표로서 할례를 받았지만,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영적 자격을 보증하는 ‘절대적 증표’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할례가 의미하는 ‘거룩, 순종, 구별됨’을 삶 가운데 실천해야 진정한 유대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도들도 세례나 예배 참석, 다양한 봉사나 헌금이 신앙의 한 표식이기는 하되, 그것이 그 자체로 우리를 의롭게 만들지는 않는다.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 앞에 내가 진실로 엎드리고 있는가, 진정한 사랑의 열매가 있는가, 순종의 걸음을 걷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바울은 앞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롬 2:6)고 선언했다. 여기에는 물론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이라는 신약의 핵심 교리가 전제된다. 그러나 믿음이 곧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단지 머릿속의 지식이나 말뿐이라면, 그것은 본질적으로 ‘죽은 믿음’이다(약 2:17). 그러므로 진정으로 믿는 자라면,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거룩과 사랑을 추구해야 한다. “당을 짓고 분쟁을 일삼는 자들, 진리를 좇지 않고 불의를 좇는 자들에겐 노와 분이 임한다”(롬 2:8)는 바울의 경고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충분히 적용된다. 교회 안에 파벌이 생기고, 사랑과 용서보다는 헐뜯음과 분쟁이 커진다면, 그들은 비록 교회의 예배와 의식에 참여한다고 해도 결코 ‘이면적 유대인’, 곧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가 될 수 없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구체적으로 “사랑 실천과 도덕적 책임”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정신을 완성하는 것이었다(마 5:17). 그 핵심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다(마 22:37-40). 그런데 유대인들은 제사의 규례, 절기, 희생제물, 음식 규정 등에 집중하면서 ‘정작 무게감 있는 정의와 긍휼, 믿음은 버렸다’(마 23:23)고 예수께서는 지적하셨다. 오늘날의 교인들도 여러 종교 행사와 프로그램에만 열심을 내면서,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상처받은 이들을 위로하며, 교회 내외의 소외된 이들을 환대하는 ‘실제적 사랑’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은 “형식만의 경건”을 가진 바리새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할 것이다.
바울은 “이방인 중에도 양심의 법을 따라 선을 행하는 이들이 있다”(롬 2:14-15)고 말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 있는 우리가 그들보다 더 낮아질 수 있어야 하고, 더 성실하게 선을 행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마음의 율법’을 저버린다면, 즉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면서 실제 삶에서는 불의를 행한다면, 이방인이 오히려 우리를 심판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강력한 선언이다(롬 2:27).
결국 로마서 2장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최종적 교훈은 “신앙의 내면화”이다. 장재형 목사 역시 “진정한 변화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표면적 제도나 의식, 외부적 열심만으로는 하나님께 칭찬을 받지 못한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 그리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야말로 참된 할례”라고 설파한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회개와 순종, 그리고 사랑의 실천이 없다면, 아무리 겉으로는 ‘신앙인’처럼 보여도 ‘표면적 유대인’에 불과하다.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해야 할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칭찬”(롬 2:29)이며, 그것은 ‘정직하고 겸손하게 마음을 열어 하나님 앞에 서는 자들’에게 허락되는 복이다.
바울의 전체 논지는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하나님께서 동일한 공의의 잣대로 심판하신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종교적 특권이나 의식적 공로가 면죄부를 제공하지 않는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되, 그 믿음이 진정한 순종과 사랑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우리는 ‘마음의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된다. 장재형 목사도 이를 토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영원한 생명과 사랑의 길이지만, 그 길을 진심으로 따르지 않고 남을 판단하거나 종교적 형식만을 붙들면, 오히려 그 복음이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심판의 잣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한다. 따라서 매일같이 내 영혼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진실히 회개하며,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을 새롭게 해야만 한다. 이것이 로마서 2장을 통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핵심이다.
끝으로, 바울이 말하는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5)는 표현처럼, 모든 인간은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는 은밀한 것도 다 드러난다(롬 2:16). 우리의 종교 활동이나 업적, 교회 내 지위와 상관없이, 결국 하나님은 ‘마음의 진정성’을 보신다. 그러므로 “나는 정말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인가? 혹은 겉으로만 할례를 받은 척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다. 장재형 목사가 역설하듯이,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복음의 참된 능력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삶의 모든 순간에서 ‘선한 열매’로 맺힐 것이다.
이상으로, 로마서 2장을 장재형 목사의 가르침을 키워드로 세 소주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째,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죄와 심판에서 예외가 없음을 확인하였고, 둘째, 영적 교만과 회개하지 않는 고집이야말로 믿는 자에게 더 엄중한 심판을 가져옴을 보았으며, 셋째, 마음의 할례를 통해 참된 순종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임을 깨달았다. 우리의 실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을 진솔하게 드러내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일’이다. 바울이 말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롬 2:6)는 선언 앞에, 오직 겸손히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새로워지는 길만이 열려 있다. 그리고 이 길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열려진 복음의 길이며, 장재형 목사가 항상 우리에게 권면하는 ‘진리의 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