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사도행전 11장의 배경과 유대인 교회, 이방인 교회의 갈등
사도행전 11장은 초대교회 내부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로,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에 벌어진 갈등과 그 극복 과정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이 장을 주해하면서 장재형목사는 “막힌 담을 헐고”라는 핵심 표현을 통해, 복음이 갖는 화해와 연합의 본질을 강조한다. 실제로 사도행전 11장에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고 식탁교제를 나눈 일이 알려지자,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성도들이 충격에 빠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들은 “이방인도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인 고유의 율법적 기준과 전통, 선민의식이 흔들릴 것을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매우 뿌리 깊은 것이었는데, 율법을 중심으로 한 거룩성과 순결의 유지가 그들의 공동체 정체성에 핵심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율법적 경계’와 ‘선민의식’이 초대교회 안에 어떤 식으로 작동했으며, 왜 그토록 큰 충격과 갈등을 일으켰는지에 주목한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자, “거룩함을 지키는 기준”이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방인과의 식탁교제”를 금기시했다. 왜냐하면 이방인은 흔히 부정한 음식을 먹고, 우상 숭배의 의식을 따르며,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는 인식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 크리스천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오래 지켜온 경건 생활과 규례가, 이방인과 섞이는 순간 훼손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매우 현실적이었다. 그 배경 속에서 고넬료 집에서 일어난 “이방인도 복음을 받고 성령을 체험한다”는 뉴스는, 단순한 신학적 놀라움이 아니라 전통과 문화 자체가 흔들리는 중대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이 단순히 “문화 차이”나 “인종 차이”에서 비롯된 갈등이 아니라, 율법과 복음 사이의 긴장에서 터져 나온 결과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십자가를 통해 “새 언약”을 열어주셨지만, 초대교회 안의 많은 유대인 성도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 준수와 유대적 전통에 강한 집착을 보였다. 사실상 신앙생활 전 영역에서 ‘토라’를 따른다는 것은 정체성과 직결된 문제였기에, “이방인도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사도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와 식탁교제를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예루살렘 교회 내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거세게 힐난한 것이다(행 11:2~3).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선민”이라는 의식이 어떻게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동시에 어떻게 그 선민 의식이‘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는지를 심도 있게 분석한다. 유대인들이 지닌 선민 의식은 본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특수한 부르심”이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배타적 형태로 굳어져 “이방인은 아예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다”라는 잘못된 극단으로 흐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배타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면, 교회가 감당해야 할 선교 사명이 심각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도행전 11장의 갈등은 “복음이 이방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필요한 필연적 진통이었고, 교회가 한 단계 성장하는 출발점”이었다고 장재형목사는 설명한다.
실제로 행 11:2~3은 “할례자들이 힐난하였다”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이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힐난(비난)에는 단순한 의문 제기가 아닌 상대를 깎아내리고, 율법을 어겼다고 단정 지으며 정죄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유대인 중심 교회의 거센 반발은, 그들이 베드로의 행위를 “율법을 저버린 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모든 비판 앞에서, 자기 개인의 의견이나 감정을 먼저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보여주신 일”을 차근차근 설명한다. 이는 갈등의 본질이 “인간적 편견”에 있지 않고, 사실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어디까지 미치는가”라는 신학적·영적 관점에 있음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오늘날 교회가 겪는 선교 현장의 갈등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교회가 복음을 전할 때, 전도자는 자칫 자신의 신앙 전통이나 문화적 배경을 ‘절대화’하여, 복음받는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태도를 취하기 쉽다. 이럴 때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문화 제국주의” 혹은 “영적 강압”처럼 비칠 위험이 있다. 반대로 복음을 받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으니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식의 무조건적 순종만을 강조하면, 참된 복음의 자유가 실현되기 어렵다.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의 갈등은, 바로 이 “전도자와 피전도자”가 지닐 수 있는 왜곡된 태도가 얼마나 큰 벽을 만들 수 있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 벽은 “오직 십자가 안에서” 무너질 수 있다고, 장재형목사는 역설한다.
사도행전 11장 전반부에서 벌어진 갈등은 “왜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그들이 어떻게 동일한 구원의 은혜를 받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유대인들은 “할례와 율법 준수”를 통해 여호와의 백성으로 구별된다고 믿었고, 이방인은 그 기준에 부합되지 않으므로 ‘깨끗하지 않은 자’로 여겨졌다. 하지만 베드로는 고넬료 집에서 복음을 전하는 순간, 그들 역시 성령의 역사를 동일하게 체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사도행전 2장에서 유대인 성도들이 성령 강림으로 겪은 체험과 “똑같은 현상”임을 깨닫는다. 인간의 기준으로 “속되다” 혹은 “깨끗하다”를 나누지만, 하나님은 이미 이방인을 깨끗하게 하셨고(행 10:15), 복음의 문을 활짝 여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에 주목하며, 교회가 ‘율법’ 혹은 ‘전통’을 소중히 여기되, 그 전통이 십자가의 은혜를 가리는 도구가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유대인 교회가 처음에 느낀 충격과 배타성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반복될 수 있다. 예컨대, 기존에 교회를 오래 다닌 성도들이나, 특정 교단 전통이 견고한 공동체가 있다면, 새롭게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이방인’에 비유할 만한 이들)이 들어올 때 마찰이 생길 수 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옳고 그르냐”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새롭게 하신 이들에게 우리가 함께 교제의 문을 열고, 동등한 형제로 인정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11장의 이 교훈이 현대 교회에 여전히 절실하다고 역설한다.
특히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을 보면, 베드로가 단순히 “나도 모르겠으니 하나님께 물어보라”고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하였다”(행 11:4)고 기록된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는 초대교회 내에서 생긴 갈등을 풀어가는 모범적인 방식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경험—즉 욥바에서 받은 환상,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의 만남, 복음을 전할 때 임한 성령의 역사—를 하나하나 펼쳐 보인다. 그의 설명은 유대인 형제들의 이해를 촉진시켰고, 그 결과 예루살렘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행 11:18)라는 고백을 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반목이 연합으로 바뀌는 극적인 순간”이자, 복음이 지닌 보편적 속성이 역사 안에 구현된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사도행전 11장 초반부에서 드러난 유대인 중심 교회와 이방인 교회의 갈등은, 구약 시대부터 이어져 온 “선민 의식”과 율법적 전통, 그리고 “새 언약”의 복음이 부딪히면서 생긴 당연한 진통이었다. 그런데 이 진통이 “새로운 부흥”의 기폭제가 된다는 점이 결정적이다. 베드로의 개인적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보여주신 계획”임을 교회가 받아들이자, 그들은 비로소“막힌 담이 헐렸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이는 계속해서 교회의 선교 영토를 넓혀가는 초석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복음의 지평을 초대교회가 발견한 사건”이라고 정의한다. 결국 이 장면은 단지 역사적 일화가 아니라, 오늘날 교회가 “새로운 시대를 맞을 때마다 반복해서 고민해야 할 핵심 주제”를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과연 복음의 본질을 중심에 두고, 모든 민족과 문화,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렇게 사도행전 11장의 갈등 배경을 정리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두 번째로 부각되는 주제가 있다. 바로 “베드로의 환상”과 그 환상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직접 개입”이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동시에 교회가 앞으로 선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근거로, 교회가 인간의 편견이나 율법주의를 넘어서는 길을 찾아야 함을 강조한다. 이제 우리는 사도행전 11장 중반부에서 베드로가 반복해서 설명하는 환상 체험과, 거기에 담긴 복음의 본질을 살펴볼 차례다.
Ⅱ. 베드로의 환상과 선교의 본질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는 예루살렘 교회가 자신을 비난할 때, 앞서 행 10장에서 이미 언급된 고넬료 사건의 전말을 다시 한번 상세히 설명한다. 여기서 핵심은 욥바에서의 환상 체험이다. 베드로가 기도하던 중 하늘에서 내려온 큰 보자기 같은 그릇 안에, 율법상 부정하다고 여겨지는 온갖 짐승들이 가득했고,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행 11:5~7). 베드로는 “속되거나 깨끗지 않은 것을 먹어본 일이 없다”고 거부하지만, 같은 음성이 세 번 반복되고, 곧이어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그를 찾아온다. 이에 베드로는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는 성령의 지시를 따르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환상 장면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의도가 “편견과 배타성을 깨부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베드로는 유대인이었고, 평생 율법 규정에 따라 부정한 음식을 입에 대지 않던 인물이다. 그런데 환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고 세 번씩이나 강조하신 것은, 기존 유대적 관념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 장벽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선언이기도 하다. 율법이 본래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 율법적 전통이 이방인을 향한 복음 전파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기존 관습이나 신학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복음의 역동성과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가”를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베드로조차도 자신이 가진 전통적 기준 때문에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발상을 대단히 꺼렸다. 갈라디아서 2장에 기록된 사건—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오면 얼른 자리를 피한 것—에서 보이듯, 그도 한동안은 율법주의적인 태도와 복음적 자유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러나 사도행전 10~11장을 거치며, 하나님께서 친히 “이방인을 깨끗하게 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그는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행10:34)는 본질적 진리에 눈을 뜨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선교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종종 보내는 자와 받는 자 사이의 우월감·열등감”이라고 설명한다. 교회가 선교지를 향해 복음을 전할 때, 언어와 문화, 신학적 체계가 발달해 있는 쪽이 그렇지 않은 쪽에게 일방적으로 군림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초대교회 시절에도,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이 ‘할례받은 유대인 교회’에 비해 영적·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인식이 만연했다. 그러나 고넬료 사건에서 드러나듯, 이방인도 동일하게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 그 자격은 율법적 행위나 종교적 스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셨다”(행 11:15)고 고백했을 때, 이는 “이방인도 구원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는 결론에 직결된다.
이러한 논리를 확장하여, 장재형목사는 “선교의 본질”을 재정의한다. 보통 사람들은 선교를 “새로운 땅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가르치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물론 그것도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더 근본적으로 보면 선교는 “하나님이 이미 일하고 계시는 현장에 교회가 동참하는 것”이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갔을 때, 이미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가정은 복음에 열려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기도 응답을 주시고, 천사를 통해 베드로를 청하도록 이끄셨다. 즉, 이방 땅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전혀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 한가운데서 이미 성령의 역사가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이 점을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초대에 교회가 응답하는 순간”이라고 부른다. 교회가 자기 방식대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않는”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진정한 선교적 돌파가 일어난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특정 문화나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영적 갈망과 하나님의 은사를, 교회가 “저건 우리 식이 아니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배척해 버린다면, 오히려 선교가 막혀버린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믿음”으로 다가가면, 서로를 향한 존중과 환대를 통해 복음의 진정한 힘이 드러난다.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서 경험한 사건은 구체적으로 “성령의 임재가 유대인에게 임했던 것과 정확히 동일한 방식으로 이방인에게도 임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복음의 평등성”이라고 부른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갈 3:28)이 바로 교회의 이상이다. 예루살렘 교회가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지만, 결국 베드로의 설명을 듣고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다”는 사실을 수용하게 된 것은, 이 이상이 실제 역사 속에서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포인트는, “교회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선교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만약 인간적 기준—율법, 문화, 전통, 편견—만을 의지한다면, 교회는 결코 이방 세계에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수 없다. 또 전한다 해도, “우리는 으뜸이요, 너희는 가르침 받아야 할 이들”이라는 우월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다. 그러나 베드로가 환상을 통해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잣대로 막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예루살렘 형제들에게 증언했고, 그 증언을 통해 교회 내부의 강한 벽이 허물어졌다.
이러한 흐름을 정리하면, 사도행전 11장의 베드로 환상 에피소드는 초대교회가 안고 있던 “율법주의와 선민의식”을 극복하는 데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더 나아가, “복음이 이스라엘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온 세상으로 확장된다”는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을 교회에 제시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교회가 복음 전파의 본질, 곧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를 다시금 깨닫는 계기”라고 불렀다.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막론하고 죄인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표”이며, 성령은 그 복음이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동력이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로마서의 주제는, 사도행전 11장에서도 동일하게 입증된다.
현대 교회도 이 장면을 거울 삼아야 한다. 복음을 오래 전부터 전해 받은 교회들(유대인에 해당)은 때로는 오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커서, 뒤늦게 복음을 접하거나 문화적 차이가 큰 공동체(이방인에 해당)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다. 또 복음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스스로를 열등하게 여기거나, 반대로 기존 교회를 무시하며 갈등을 일으킬 수도 있다. 장재형목사는 “교만과 열등감 모두 복음의 적”이라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서 우리는 모두 동등한 은혜를 입었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선교 현장에서 흔히 발생하는 ‘문화 충돌’을 다룰 때도 이 원리가 중요하다. 언어와 관습, 음식 문화 등에서 다소간의 차이가 있어도, “하나님이 이미 그 땅에서 역사하신다”는 믿음 위에 서면, 교회는 상대방을 환대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때 복음은 억압이 아니라 해방이 되고, 문화 지배가 아니라 문화 갱신의 길을 열어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식탁교제”라는 개념으로 종종 비유한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하셨던 것처럼, 교회도 자신과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을 식탁에 초대하여, 복음의 환대를 몸소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베드로의 환상과 고넬료 사건,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루어진 해명이 보여주는 핵심은 이렇다. 첫째, 복음은 특정 민족이나 전통에 매여 있지 않다. 둘째, 성령은 교회의 예상 밖의 장소, 예상 밖의 사람들에게도 임하신다. 셋째, 교회는 인간적 편견과 울타리를 부수고, “하나님이 이미 깨끗하게 하신 그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넷째, 그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결국 하나님의 계획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기회가 된다는 점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메시지가 시대를 초월하는 힘을 지닌다고 거듭 강조한다.
이처럼 갈등의 배경과 해결 과정을 살피다 보면, 자연스럽게 교회가 이방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번져 나가는 결정적인 거점이 어디였는지를 주목하게 된다. 바로 사도행전 11장 후반부에 등장하는 안디옥교회이다. 이 교회는 혼합된 문화와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는 도시에서 탄생했고, 이후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하며 본격적으로 세계 선교의 전초기지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안디옥교회의 출현과 성장 과정을 통해, 교회가 실천해야 할 “예언자적 역할”과 “상호협력의 모델”을 밝힌다. 그리고 이 안디옥교회의 사례는 단지 초대교회의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교회가 “복음의 지경”을 넓혀 가는 현장에서 늘 참고해야 할 지침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마지막 세 번째 소주제에서는 안디옥교회의 탄생 배경과 그 안에서 예언자의 역할이 어떻게 빛을 발했는지,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와의 협력이 어떤 시너지를 만들어냈는지 집중적으로 살펴보게 된다.
Ⅲ. 안디옥교회의 탄생과 예언자의 역할
사도행전 11장 후반부(19~30절)는 초대교회가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 이후 흩어지면서, 이방 지역에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해지는 장면을 보여준다. 베니게와 구브로, 그리고 안디옥에 이르기까지 흩어진 성도들은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다(행 11:19). 이는 “유대인 중심”의 전도 방식이 여전히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행 11:20에서,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했다는 중요한 전환점이 언급된다. 바로 이 사건이 “안디옥교회”가 탄생하는 불씨가 되었다. 사도행전 기자는 이들이 이름 없는 평신도—혹은 전문 사도 계보에 속하지 않는 무명의 전도자—였음을 암시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주목하여, “이방 선교의 결정적 시작점에는 평범한 성도들의 자발적 헌신이 있었다”고 평가한다.
안디옥은 당대 로마 제국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여기에는 무역로가 발달했으며,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도 상당수 거주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토대가 어느 정도 갖춰져 있었다. 동시에 온갖 우상 숭배와 이방 문화가 복잡하게 어우러진 도시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다문화 도시’라는 특성이, 복음이 유대인 신자들을 뛰어넘어 헬라인에게까지 확장되는 데 좋은 자양분이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하나님께서 교회가 문을 닫고 머물지 않도록, 복음이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환경을 사용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렇게 안디옥에서 복음이 왕성하게 전해지자, 예루살렘 교회가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파견한다(행 11:22). 이는 “교회 간 협력”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예루살렘 교회 입장에서는 새로운 흐름이 일어나는 곳을 검증하고 지도할 필요가 있었겠지만,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통제”가 아니라 “협력”의 마음이 중요했다고 본다. 실제로 바나바는 안디옥에 도착하자마자, 그곳에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한다(행 11:23). 그리고 “굳건한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며 격려한다. 그는 자신이 지도자로서 모든 것을 주도하기보다, 이미 벌어지고 있는 은혜의 역사를 인정하고, 성도들을 독려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바나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울(바울)을 데려오기 위해 다소로 간다(행 11:25~26). 그러고 나서 바나바와 사울은 약 1년 동안 안디옥에서 함께 사역하며 많은 사람들을 가르친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새로운 리더십 공동체의 태동”으로 해석한다. 과거 예루살렘교회는 열두 사도가 중심이었지만,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비롯해 다양한 이방 출신 리더들이 함께 세워진다. 이 과정을 통해 초대교회가 본격적으로 “세계 선교”를 향해 발돋움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된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특히 바나바가 자신의 주도권을 내려놓고 바울이라는 ‘앞으로 더 큰 역할을 하게 될 인물’을 세우는 모습을 교회가 배우기를 권면한다. 이는 결국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서로 섬김과 협업”의 대표적 모델이라는 것이다.
안디옥교회의 등장이 갖는 의의는, 바로 이곳에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는 점에 집약된다(행11:26). 유대인도 헬라인도 아닌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로서 새로운 정체성을 세상에 드러냈다는 뜻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야말로 초대교회가 지향해야 할 본질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헬라인”이 다수 섞인 곳에서, 더는 그 공동체가 “유대인 종교”로만 여겨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새로운 무리”라는 정체성을 확보한 것이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11:27~30절에는 예언자 아가보가 등장하여, 앞으로 큰 흉년이 들 것을 예고하고, 그 예고에 근거해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 형제들을 위해 구제 헌금을 모아 보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초대교회 예언자적 사역의 실제적 기능”과 “교회 간 상호 부조(互助)의 중요성”을 동시에 발견한다. 아가보가 전한 예언은 그저 영적 체험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가 실제로 행할 구체적 실천을 낳았다. 이것이 “예언”과 “실천”의 건강한 결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흉년이 닥치기 전에 미리 헌금을 준비해 예루살렘교회에 보내는 장면은, 한때 이방인 교회로 분류되어 갈등을 겪을 뻔했던 안디옥교회가, 이제는 유대인 교회와 한 몸임을 실질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이러한 교회 간 협력은 갈라디아서와 고린도후서 등 바울 서신에서도 반복해서 언급된다. 바울은 이방인 교회들에서 모금한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함으로써, “보내는 쪽과 받는 쪽이 하나 되는 연합의 표지”를 만들려 했다(롬 15:25~27).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교회는 한 몸”이라는 사도적 신학이 현실 속에서 구체화된 모습이라고 본다. 만약 예루살렘교회가 계속해서 “율법 중심”을 고수하며 이방 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면, 이런 상호부조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고, 교회가 세계로 확장되는 동력도 심각하게 제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행전 11장에서 확인하듯,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임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고, 안디옥교회를 중심으로 새롭게 태어난 공동체가 협력의 손길을 내밀었기에, 복음은 로마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갈 수 있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모델을 현대 교회가 주목해야 한다고 거듭 역설한다. 교회가 조직적으로 커질수록, 다양한 문화적·신학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한 공동체 안에 공존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때 가장 큰 도전은 “갈등”이다. 그리고 갈등을 풀어가는 핵심은 “복음의 본질”과 “연합을 향한 헌신”에 있다. 안디옥교회가 보여준 연합의 실천—곧 예루살렘교회의 물질적 필요를 돕고,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에 리더들을 파송하여 가르침을 제공하는 상호 작용—는 지리적 거리를 뛰어넘은 형제애의 구체적 예시다. 더불어 아가보 같은 예언자가 전한 “미래 상황”에 교회가 지혜롭게 대비한 점도, 영적 통찰과 실천이 결합된 교회 공동체의 전형적인 강점을 보여준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사도행전 11장에 나타난 안디옥교회의 모델을 가리켜 “세계 선교의 시작점이자, 교회 내부의 융합과 연합이 결실을 맺는 장면”이라고 요약한다.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베드로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이 이미 깨끗하게 하신 이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인 결과, 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이룬다. 그리고 이 성장의 열매가 “흉년에 대비한 구제”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한 세계 선교”로 이어진다. 이는 교회가 ‘자신을 위한 모임’으로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서도 내부적으로 깊은 연대를 형성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안디옥에서 비롯된 바울의 1, 2, 3차 전도여행이 로마 제국을 누비게 되면서, 복음은 유대 땅을 넘어 헬라 세계와 서방으로 확장되는 본격적 교두보를 확보하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교회가 지닌 선교적 사명”의 성취 과정으로 해석한다. 단순히 예루살렘이라는 한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는 계속해서 지경을 넓혀간다. 안디옥교회의 사례는 바로 그 지경 확대의 시금석이었다. 그리고 이는 “장재형목사가 역설하는 복음의 지평”이라는 표현과 정확히 맞물린다. 복음은 한 지역이나 한 민족, 한 문화권에 갇혀 있을 수 없고, 결국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따라서 사도행전 11장을 놓고 “우리는 어떤 교회를 꿈꾸는가?”를 스스로 묻도록 권면한다. 혹시라도 교회가 특정 문화를 절대화하거나, 신학적 전통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새로운 이들을 배척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복음이 이미 일하고 있는 현장으로 들어가기를 두려워하며 교회 내에 안주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디옥교회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세상으로부터 얻은 것은, 그들이 이방 문화와 뒤섞이면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과 가르침을 실천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교회와도 끊임없는 소통과 협력을 이어갔고, 흉년에 대비해 구제 헌금을 보내는 등 실제 행동으로 복음을 증거했다.
결국, 사도행전 11장 마지막 부분에서 펼쳐지는 안디옥교회의 모습은, 유대교 전통에 뿌리를 둔 예루살렘교회와 새롭게 등장한 다문화 교회가 “한 몸으로” 협력하는 아름다운 결말을 보여준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앞서 베드로가 보여준 “이방인 차별을 깨는 환상”을 교회 전체가 수용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가 먼저 “편견과 배타성”의 벽을 무너뜨렸을 때, 곧바로 폭넓은 선교와 효과적인 구제, 그리고 영적 성장의 기회가 열렸던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복음의 본질에 복종하는 교회가 누리는 열매”라고 평가한다. 인간적인 제도나 전통, 형식에 매몰되지 않고,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며, 십자가의 사랑을 모든 이에게 열어 둔다”는 태도가 곧 교회가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이다.
사실 초대교회가 계속해서 직면했던 어려움—유대인과 헬라인의 충돌, 율법 논쟁, 교회 내 파벌, 그리고 외부의 핍박—을 극복해 낼 수 있었던 근본 동력은 “하나님의 직접 개입”과 “성령의 주권”이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예루살렘교회가 베드로에게 제기한 거친 항의도, 베드로가 환상 체험을 제시하며 성령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설명하자, 결국 수그러들었고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했다. 안디옥교회가 예루살렘교회를 돕기로 결정한 것도, 단순히 인간적 호의가 아니라, 예언자 아가보의 메시지—곧 성령의 인도—를 듣고 움직인 결과였다. 즉, 교회가 계속해서 분열하지 않고 “새 시대”를 맞이할 수 있었던 힘은, 이처럼 하나님이 이루시는 화해와 협력의 역사를 순종하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결론을 다시 한번 강조하며, 교회가 역사 속에서 가장 크게 성장한 시점은 언제나 “편견을 내려놓고, 복음에 기초한 연합을 이룰 때”였다고 말한다. 반대로 교회가 자신들만의 경계선을 그어놓고, “우리만 옳다”는 우월감이나 “저들은 배척해야 한다”는 폐쇄성을 고수할 때는, 내부적으로도 정체와 분열을 겪었다. “막힌 담을 허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교회의 정체성의 뿌리임을 잊어버리면, 교회는 금세 타성에 젖어 복음의 역동성을 상실하고, 교세 확장에만 집착하거나 자기 보존적 성향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사도행전 11장의 사건을 기점으로 “한 몸”이 되어, 훗날 로마 제국 전역에 복음을 전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갈등이 있었어도, 결국 “성령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 11장을 통해 끊임없이 환기하는 메시지는, “교회는 복음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이며, 민족·문화·전통의 장벽을 넘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 중심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처음에는 서로 큰 벽을 느꼈으나,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고 나자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라고 함께 기뻐했다. 또한 안디옥교회는 그 기쁨을 자발적 구제로까지 연결하여,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돕는 모습으로 결속을 확인했다. 이 같은 사도행전 11장의 흐름이야말로, 교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보편적 선교 공동체’를 미리 보여주는 모델인 셈이다.
오늘날 교회가 이 정신을 이어받으려면, “복음의 지평을 넓히는” 결단이 필요하다. 교회 안에 혹시라도 남아 있는 “배타적 교리”나 “문화적 편견”이 복음을 제한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가 새로운 성도나 다른 민족·언어권 성도들을 온전히 환대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또한, 이미 선교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지원하고, 그곳에서 배우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예루살렘교회처럼 “파견”의 의무와, 안디옥교회처럼 “서로 섬기고 돕는” 구체적 실천을 결합할 때, 교회는 더욱 성숙해질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이상이 바로 “십자가를 중심에 둔 선교”이며, 사도행전 11장이 제시하는 교회의 원형(原形)에 가장 근접한 모습이라고 결론지었다.
요컨대, 사도행전 11장은 크게 세 가지 흐름 속에서 초대교회가 어떻게 “세계 선교의 토대”를 마련했는지 잘 보여준다. 첫째, 유대인 중심 교회와 이방인 교회 간 갈등은 “선민의식”과 “율법적 전통”이 어떻게 복음과 부딪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둘째, 베드로가 경험한 환상과 고넬료 사건은 선교가 “하나님 주권의 자유로움” 위에 서 있으며, 교회는 그 사실에 순종해야 함을 일깨운다. 셋째, 안디옥교회의 탄생과 예언자 아가보의 활동,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와의 협력은 “실천적 연합”이 교회 발전에 핵심 동력이 된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리고 이 모든 서사는 결국 “막힌 담을 허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초대교회가 겪었던 모든 갈등과 화해의 과정은, 과거 한 시대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교회가 늘 되짚어야 할 지침서”라고 결론짓는다. 실제로 지역 교회 안에서도 교파나 전통, 신학적 스펙트럼이 달라 갈등이 생길 수 있고, 해외 선교지에서도 문화적 장벽이나 편견을 만나기 쉽다. 이런 상황을 맞이할 때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이미 그곳에서 일하고 계시며, 교회는 그 부르심에 동참하도록 초대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초대에 응답하려면, “인간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성령의 음성에 겸손히 귀 기울이는 태도”가 필수적이다.
결국, 사도행전 11장은 “교회가 어디에서 왔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며,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명쾌한 답을 제시한다. 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는 담을 허물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 받은 모든 이들을 연합시키는 공동체다. 그 연합은 단지 머릿속 신학 개념이 아니라, 실제로 서로를 돕고 섬기는 구제와 파송, 그리고 영적 교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날로 새로워지고, 복음의 지평이 끝없이 확장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가 “복음의 지평”이라는 표현으로 일깨우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점—“교회가 자신을 넘어, 세상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끊임없이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맥락을 살펴보면, 사도행전 11장은 과거 1세기 교회의 역사기록이면서도, 동시에 21세기 교회가 직면한 선교적 도전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해답을 품고 있다. 교회가 문화적·종교적·인종적 편견을 뛰어넘어 하나 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전 세계를 향해 복음을 전하며, 연합된 공동체로서 상호 부조와 협력을 아끼지 않을 때, 복음은 다시 한번 놀라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이미 초대교회가 걸어왔다는 사실을 우리가 잊지 않는다면, 어떤 갈등과 문제 앞에서도 “십자가가 우리의 벽을 헐고, 성령이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재형목사가 사도행전 11장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이며, 오늘날 교회가 붙들어야 할 방향성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