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 – 장재형(장다윗)목사

1.네 복음서의 상징과 예수 그리스도의 다면적 정체성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복음 메시지는 네 복음서가 보여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면적 정체성을 “계시록에 등장하는 네 생물”에 빗대어 해석하는 오랜 교회 전통 위에 서 있다. 그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각각 서로 다른 시대적·신학적 배경 속에서 예수님의 사역과 존재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이러한 관점은 구약과신약을 아우르면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다층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틀이 된다. 특히 이 전통적 해석은 계시록 4장에 언급되는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의 이미지가 네 복음서에 각각 대응된다는 중세 시기 이후의 해석적흐름과 닿아 있으며, 여기서 장재형목사는 그 이미지를 활용해 네 복음서의 핵심 메시지를 재조명한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서 그려내는 측면이 강하기에 사자로 상징되며, 실제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왕권을 계승한 참 왕이자 아브라함의 언약을 잇는 메시아임을 강조한다. 마태복음의 족보가아브라함과 다윗을 핵심으로 전개되는 것은, 유대인 청중이 관심을 두었던 혈통과 언약, 그리고 왕권 계승의 정통성에 대한 관심사를 그대로 반영한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혈통, 다윗으로 이어지는 왕권이 모두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다는 사실이 드러나기에, 마태복음 1장부터 펼쳐지는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단지 한 인물의 출생을전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구원사에 대한 소망과 기대가 어떻게 메시아 예수 안에서 결실되는지를 보여주는 신학적 드라마가 된다. 이런 면에서 장재형목사는 마태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사자로 상징하는 전통을 되새기며, 만왕의 왕으로 오신 분의 위엄과 권능, 그리고 언약 성취라는 맥락 속에서 구원의 왕 되심을 설파한다.

반면 마가복음은 로마를 향한 실천적이고 빠른 호흡의 복음서로 흔히 이해되며, 로마인의 ‘즉각적 행동’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사고방식을 고려하여 복음을 설명해간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제시되며, 장재형목사는 이를 희생적 봉사를 상징하는 송아지 이미지와 연결하여 설명한다. 마가복음에서는 “곧”이라는 단어가빈번히 등장하고, 예수님의 사역이 매우 재빠르게 이동하면서 기적과 치유를 연달아 행하는 모습이 담긴다. 이것은 예수님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다는(막 10:45) 핵심 구절과도 직결된다. 송아지가 자신을 제물로 드림으로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는 상징적 이미지로사용되었던 구약 제사 제도와 맞물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희생을 완성하시므로 인류 구원을 성취하시기까지‘철저한 종’으로 순종하셨음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오늘날 신앙인에게도 주어진 섬김의 본이 무엇인지 설명하며, 복음이 단지 왕의 권세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종의 모습으로 이땅에 오셨음을 함께 강조한다.

누가복음은 인자를 상징하는 ‘사람’의 이미지와 긴밀히 연결된다. 누가복음의 족보는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는 예수님이 유대 민족만을 위한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구세주이심을 상징한다. 실제로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 약자, 죄인, 이방인, 여성, 어린아이 등 사회적 주변부에 놓인 이들을 돌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헬라-로마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누가의 시선, 그리고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계획에 대한 신학적 강조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출생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당대에 그다지 존중받지 못하던 직업군이었지만, 그들에게 제일 먼저 천사가 소식을 전한다는 점, 시므온과 안나처럼 성전에서 예수님을 맞이한 경건한 이들만이 아니라 문둥병자, 세리, 죄인, 심지어는 로마 군인까지 포용하시는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누가복음은 인간성을 전면적으로 회복하시는 예수님을 보여준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인자(人子)’라는 호칭이 가지는 무게와 신학적 함의를 더욱 확장하여 설명하면서, 예수님이 단순히 유대인의메시아가 아니라 ‘온 인류가 찾는 구원자’가 되심을 되짚는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독수리 이미지에 비유되곤 한다. 이 독수리 이미지는 예수님의 신적기원을 강조하며, 태초에 계셨던 로고스가 인간의 역사로 내려오시는 장엄한 사건을 가리킨다. “태초에 말씀이계시니라”(요 1:1)라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되는 요한복음은, 헬라 철학으로 상징되는 그레꼬-로마 지성 세계 속에서 복음의 진리성을 변증하는 특별한 전략적 지위를 갖는다. 장재형목사는 요한복음이 기원후 1세기 말경에 쓰였음을 상기시키며, 이미 복음이 지중해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헬라 철학이 보편학문으로 자리잡은 상황 속에서, 저자 요한이 ‘로고스’라는 개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 것은 대단히 독창적이면서도 선교학적으로 탁월한선택이었다고 말한다. 하늘에 존재하시는 분, 곧 무한한 높이와 권능을 지니신 분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내려오셨다는 메시지는 예수님의 신성을 극적으로 드러내며, 동시에 이 땅에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

이렇듯 장재형목사는 네 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양한 면모를 계시록의 네 생물 이미지와 결합해풀어냄으로써, 독자들이 예수님을 여러 각도에서 새롭게 응시하도록 돕는다. 왕, 종, 인자, 그리고 하늘 독수리로비유되는 예수님은 같은 본질을 지닌 한 분이시지만, 각 복음서가 강조하는 초점은 서로 다르다. 이러한 해석은교회의 오랜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지만, 그것이 단순한 상징 해석으로 끝나지 않고, 오늘날 신앙인에게 예수님의 폭넓은 성품과 구원 사역을 더욱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 해설 지침이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복음서가 특정 독자층과 시대적 배경, 선교적 목적에 맞추어 예수님을 어떻게 제시하고 있는지 살펴볼 때, 비로소예수님의 다면성이 통합적으로 다가오며, 그것이 복음의 풍성함을 맛보게 하는 길이라고 역설한다.

2. 태초의 로고스와 성육신 신비에 대한 헬라-로마 세계적 해명
장재형목사는 이어서 요한복음 1장에 등장하는 로고스(말씀) 개념과 그 배경이 된 헬라 철학의 사상 세계를 심도깊게 다룬다. 헬라 철학자들은 우주가 어떻게 질서와 이치를 유지하는지, 변치 않는 보편적 원리는 무엇인지 궁구했고, 이를 로고스라 부르며 탐구했다. 로고스란 본질적으로 “이성적 원리” “말씀” “질서”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인간의 언어, 논리, 우주적 조화의 근본을 묶는 핵심이라고 여겨졌다. 이를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목함으로써, 당대 헬라 지성인들에게 매력적인 선교적 다리를 놓은 셈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요한의 선언은 창세기 1장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기억하는유대인 독자들에게 익숙한 동시에, 로고스 사상을 탐구하던 이방 지성인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유대인이라면 말씀이 곧 하나님의 창조적 도구라는 사실을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체득해왔고, 헬라인이라면 말씀이 곧불변의 우주 원리로서 철학적으로 탐구해야 할 대상이라 이해했다. 요한은 이 둘을 결합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 이전부터 하나님과 함께하신 분, 곧 하나님 자신이시며, 만물을 지으신 주체라는 폭발적 진리를 선포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지점에서 “예수님이 단지 예언자나 도덕적 스승, 혹은 유대인들만의 메시아가 아니다”라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존재하셨고,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하나님과 동일 본성을 지닌 분이시다. 그러나 그분이 육신을 입고 사람 가운데 거하셨다는 사실 자체가 헬라 철학이 도달하지 못한 지점이었다. 헬라 철학자들에게는 신적 존재가 물질세계로 내려온다는 개념이 익숙하지 않았다. 오히려 플라톤적 사유에 따르면 신적·이데아적 세계는 물질계에 오염되지 않는다. 하지만 요한은 바로 그 불가해 보이는 사건이 역사적으로 일어났음을 ‘성육신’이라는 단어로 선언한다.

성육신(Incarnation)의 본질은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인간의 몸을 취하셨다는 점에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죄와 어둠에 빠진 인류에게 친히 찾아오신 사랑의 절정’이라 말한다. 율법과 예언자들을통해 수 세기 동안 하나님을 가르침받았던 이스라엘조차, 실제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사건은 전혀 예상치못한 수준의 충격이었음을 역사적 문맥 속에서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헬라 철학자들이나 로마의 권력자들은‘신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그리스·로마 신화의 잡다한 신화적 일화로 혼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그것이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실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복음서 전체의 전개를 통해 증명해 나간다.

장재형목사는 ‘로고스’라는 개념이 가지는 문화·역사·선교적 가치를 언급하며, 교회가 복음을 전파할 때 어떤 언어적·개념적 틀을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모범으로 요한복음을 제시한다. 복음이 유대인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온 인류에게 퍼져나가야 했기에, 헬라 철학을 어느 정도 수용하고 그 언어를 변형하여예수를 선포하는 것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특히 사도 바울이 아레오바고 언덕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해 논하면서 헬라 문학과 철학자들을 언급했던(행 17장) 모습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그리하여 요한복음 1장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라는 구절은 예수님의 신성과 창조주 되심을 분명히 한다. 예수님은 태초 이전부터 존재하셨고,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신다. “그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이어지는 구절은, 예수님을 떠나서는 어떠한 생명과 빛도존재할 수 없음을 암시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빛’이란 단지 윤리적 가르침이나 인식론적 깨달음이 아니라,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새 창조를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설명한다. 어둠과 혼돈의 지배 아래있던 인류 역사는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참 진리를 맞이하게 되며, 이는 복음이 가진 ‘어둠을 뚫고 들어오는 빛’이라는 역동적 특성을 부각시킨다.

결국 장재형목사가 요한복음 1장에서 반복해 강조하는 것은, 성육신은 단지 한 철학적 개념을 그럴듯하게 재활용한 것이 아니라, 신학의 핵심 진리를 깊이 있게 펼쳐내는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유대적 뿌리를 두면서도 이방 세계에 복음을 선포해야 했던 초대교회 입장에서는, 이 로고스 사상의 접목이 복음 전파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신앙인들은 헬라적·서구적 사고, 혹은 과학적·합리적 이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이 곧 모든 것의 근원이자 중심”임을 도전적으로 선포해야 하는데, 이것이 요한복음의 ‘로고스’ 도입이 준교훈이라는 점을 장재형목사는 짚어낸다.

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임하신 은혜와 진리의 충만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는 구절은 기독교가 말하는 성육신의 전모를가장 장엄하면서도 간결하게 표현해 준다. 이 말씀을 장재형목사는 ‘하나님의 극진한 사랑과 자기 비하의 결정체’라고 소개한다. 왜냐하면 무한하시고 절대적 거룩을 가지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의 행동이기 때문이다. 종교사나 철학사를 살펴보면, 신이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는 흔히 신화적 상상 안에서는 종종 등장하지만, 그것이 역사적 사실로서 증명되고, 더 나아가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는 내용은 오직 기독교 복음 안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이 두드러진 차이이다.

장재형목사는 이어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사건이 가져오는 결과를 크게 두 갈래로 설명한다. 첫째로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고, 둘째로는 그 만남이단지 종교적 예식이나 의무감에 머무르지 않고, ‘은혜와 진리’의 충만을 체험하는 실존적 해방으로 이어진다는점이다. 죄로 인해 굳게 닫혔던 에덴동산의 문이 예수님 안에서 재개방되며, 이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성육신은 구약에서 예언된 여러 메시지를 결집시키는 정점이기도 하다.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사 7:14), 곧‘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역사 안에 구체화된다. 모세가 “나 같은 선지자를하나님께서 일으키실 것”이라고 예언했던(신 18:15) 그 인물은 바로 예수님이시며, 다윗 왕조에 영원한 왕이 세워질 것이라는 약속(삼하 7:12-13)도 예수님께서 이루신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구약과의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성육신은 신약만의 파격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완성되는 열쇠라고 역설한다.

더 나아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것은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사랑과 진리가 완전하게 구현되었음을 의미한다. 구약의 율법은 죄를 보여주고 심판을 경고함으로써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복음은 죄인임을 자각한 이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이 다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길을열어준다. “진리” 역시 예수님 안에서 계시되는데, 이는 단지 교리에 대한 인지적 통찰을 넘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의 방식과 존재의 목적을 체험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을 뜻한다.

장재형목사는 율법으로는 불가능했던 구원, 즉 인간 스스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던 죄 사함과 영생을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십자가에서 자신의 죽음으로 이루셨음을 상세히 해설한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에서 예수님을 ‘두번째 아담’으로 설명하듯이,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죄와 사망이 세상에 들어왔으나,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이 다시 열려 온 인류에게 주어졌다. 이 교리는 성육신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 하나님이 사람이되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의 속죄가 어떠한 의미로도 성취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성육신을 통해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는 비극적 상황이 일시적으로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는 참 빛이 이미 세상에 임하였고, 누구든지 이 빛을 받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소망의메시지가 함께 선포된다. 장재형목사는 어둠에 익숙한 세상이 빛을 거부하거나 알아보지 못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신앙인은 이런 비극을 통과하더라도 끝내 빛이 승리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희망을 붙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를 영접하지 못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복음을 알아보지 못하는 많은 이들의 모습과 겹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은 결코 꺼지지 않으며, 예수님 안에서 은혜와 진리의길이 활짝 열려 있다는 사실이 성육신의 결정적 의미라고 강조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성육신 사건을 성탄절과 직접 연결시키면서, 크리스마스의 본래 의미가 단지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축소되지 않기를 당부한다. 그 아기 예수는 곧 태초의 로고스이며,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고, 결국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인류 죄를 대속하실 분이다. 아기 예수 탄생이 귀엽고 따뜻한 이미지를 준다 할지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무거운 구원 드라마가 내재해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성육신은 우주적 사건이며, 역사의 흐름을바꿀 정도의 파급력을 지녔고, 인간의 죄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제시하는 구원의 시작점이다.

4. 어둠과 죽음의 현실을 뚫는 구원의 빛과 성탄의 신학적 의의
장재형목사는 복음을 때로는 “슬픈 이야기”라고 부른다. 그 까닭은 죄와 죽음, 어둠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의 비극적 현실이 복음의 배경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을 떠난 순간부터, 역사는 끊임없이 죄의 사슬, 우상 숭배, 영적 방황을 반복해 왔고, 결국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서 어떤 철학도, 어떤 제도도 근본적 해결책을제시하지 못했다. 이 같은 절망은 구약의 역사와 율법이 보여주는 인간의 한계, 그리고 세속 정치 권력과 의식 체계가 드러내는 불완전함을 통해 더욱 극명해진다.

그러나 이 슬픈 이야기는 동시에 “희망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어둠 한가운데로 하나님 스스로가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신성의 영광을 지니신 분이지만, 그 영광을 스스로 버리고 가장 낮은 자의 자리, 곧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실을 두고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가장 낮은 모습으로, 연약하고 불안정한 아기의 모습으로 들어오신 것은,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포괄적 구원을 의도하신 것”이라 설명한다. 부유하거나 건강하거나 지위가 높아야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힘없고 가난하며 소외된 이들조차도 마음 문을 연다면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성탄절은 이런 맥락에서 역사적 분기점이 된다. 예수님의 탄생은 BC와 AD를 가르는 상징이 되었으며, 교회는 예수님의 오심을 기점으로 시간 개념을 새롭게 설정해 왔다. 구약 시대가 아무리 절망적이고 율법의 멍에가 무거웠을지라도, 이제 예수 안에 있는 이들은 새로운 시대로 들어간다. 이것을 장재형목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패러다임 전환”이라고 부른다. 어둠의 지배가 종말을 고하고, 빛의 통치가 시작되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복음 이야기를 조금 더 따라가 보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 그분의 고난과 죽음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알게 된다. 인간들이 기다렸던 메시아가 막상 오셨을 때, 많은 이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거부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이는 요한복음 1장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다”라는 구절로 요약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이 복음의 슬픔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다고 지적한다. 빛과 진리가 어둠과거짓 앞에 선포되었을 때, 세상은 환영하기보다는 거부와 폭력을 선택했다. 이로써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처참한 죽음에 내던져졌고, 제자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복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죽음은 역설적으로 인류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십자가가 “영광의 보좌”가 되었다고 말하며, 예수님의 죽음 안에 구원 계획이 완성되는 신적 역설을 강조한다. 이는 십자가 부활 사건으로 이어지면서, 예수님이 단지 역사 속 한 비극적 순교자로 머무르지 않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산 소망’의 창시자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성탄절의 아기 예수는 그 자체로 구원의 결실을 담기보다는, 십자가와 부활을 향해 나아가는 서막, 곧 하나님의 예정된 드라마의 시작점임을 이로써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장재형목사는 성탄절을 단지 “아기의 탄생” 축하로 소비하지 말고, 그 아기가 궁극적으로 걸어가신 길, 그리고 그 길이 인류에게 열어놓은 구원의 문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탄절의 기쁨 뒤에는십자가의 고통이 자리하며, 그 고통은 다시 부활의 승리로 이어진다. 이 과정을 온전히 꿰뚫어볼 때, 우리는 성육신의 진정한 깊이를 헤아릴 수 있고, 복음이 제시하는 ‘눈물과 사랑과 희생을 통한 진리와 은혜의 완성’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끝으로, 장재형목사는 성탄절이 매해 돌아오는 기념일이지만, 그것은 결코 ‘반복’에 머무르지 않고 ‘갱신’이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구원의 은혜는 생생하게 매일 새롭게 경험될 수 있으며, 그 경험은 신앙인이 세상 속에서 빛과소금으로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된다. 어둠 속에 갇힌 이들이 여전히 많고, 죽음과 절망이 만연한 시대에 예수님의 성육신은 단지 2000년 전 사건으로 지나간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빛으로 우리를 비춘다. 우리는 그 빛을 따라 걸으며,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심을 받은 존재라는 인식을 가지고 세상 가운데 파송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현대 교회의 선교적 사명과 연결하며,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우리 안에 임하신 것처럼, 교회 역시 복음의 메시지를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언어와 행동으로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점을 짚어낸다.

결국 성탄은 사랑으로 오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절기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랑이 교회를 통해 세상 끝까지 확장되는선교의 시발점으로 작동해야 한다. 성육신은 이 땅의 고난과 연약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직접 감당하신 하나님의 결정적 행동이었기에, 교회 역시 세상의 고통과 아픔을 지켜보는 데 그치지 말고, 그 속으로 들어가 복음을 실천하고 증언해야 할 당위를 지니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성탄절을 지날 때마다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돌봄과 구원의 열정을 다시금 떠올려야 한다”고 강조하며, 이를 통해 복음 메시지가 단순한 종교 이념이 아니라 실제 삶의 변화, 역사와 문화를 바꾸는 생명력이 됨을 끊임없이 확인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처럼 장재형목사가 전하는 복음 이해는 네 복음서 각각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정체성과 로고스 개념의 선교적 확장, 그리고 성육신의 은혜와 진리를 구체적으로 연결시켜, 성탄절을 기점으로 해서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가얼마나 광대하고 심오한 차원에서 펼쳐지고 있는지를 되새기게 한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성탄 시즌에 예수님의아기 모습을 떠올리며 일시적 감상에 젖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분이 걸어가신 길과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을 체화하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복음은 과거 어느 시점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통과하여 미래로 향하는 살아 있는 진리이며, 성육신은 지금도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충격이자 감동으로 다가와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설파하는 이 네 가지 흐름—네 복음서의 상징, 태초의 로고스와 성육신, 은혜와 진리의 충만, 그리고 어둠과 죽음의 세계에서 밝히는 구원의 빛과 성탄의 의미—은 각기 다른 조명처럼 보이지만, 결국 한 지점을가리킨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 안에서 펼쳐지는 우주적 구원 이야기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이 제시하는 예수님의 면모는 역사적, 신학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채롭게 표현되지만, 그 결론은 동일하다.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시며,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부활하심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생명의 빛을 확립하셨다.

이 복음이 전달되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 중 하나가 성육신 사건으로, 성육신은 인류가 다시금 창조주의 품으로 돌아가는 길을 여는 시작이 되었다. 아무리 캄캄한 시대라도 빛은 침투해 들어올 수 있으며, 죄와 죽음의 사슬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끊어질 수 있다. 교회는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았고, 성탄절은 그 사명을 다시금 다짐하는 중요한 시점이다. 교회 전통에 따르면 대림절(대강절) 기간은 예수님의 오심을 예비하고 묵상하는 시기이기에, 장재형목사는 이 시기를 통해 복음서의 메시지를 깊이 탐구하고 성육신 신학을 묵상함으로써, 성탄절의 진정한 기쁨을 체험하고 삶으로 실천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결국 장재형목사는 단순히 “성육신”이라는 개념적 교리를 설명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 교리가 인간의 존재와 삶, 사회와 역사 전체에 미치는 함의를 다룬다. 우리가 전에는 죄와 두려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요 1:12)를 주셨다는 사실은, 종교적 율법주의나 형식적 의식주의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새로운 차원의 해방이다. 신앙인이라면 이 구원의 기쁨을 매일 새롭게 곱씹어야 하고, 그 기쁨이 세상의 가치관에 순응하거나 절망에 빠지기 쉬운 우리를 다시금 깨우며, 빛의 자녀로서 살도록 이끈다.

“성육신”은 과거 한 시점에서 끝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그리스도와 연합’한 삶을 살 때마다 재현되고, 교회 공동체가 세상 한복판에서 복음을 실천할 때마다 드러나는 살아 있는 신비다. 이것이 장재형목사가 끊임없이 설교와 저술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이며, 요한복음 1장을 깊이 파고들어 헬라 철학적 맥락, 유대적 언약 전통, 로마 제국의 세계관 등을 종합해가며 펼쳐 보이는 복음 해석의 맥락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종착점은 바로 “예수는 누구이신가”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귀결된다. 네 복음서는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라는 상징을 통해 예수님의 정체를 폭넓게 드러내고, 요한복음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장엄한 문장은 예수님이 곧 영원 전부터 계셨고, 모든 피조물과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천명한다. 그분이 육신을 입고 오셨기에 우리는 이제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참 생명의 소유자로, 진리의 길 위로 나아갈수 있다. 성탄절은 이 위대한 사실을 경축하는 날이요, 동시에 우리 스스로에게 “나는 이 성육신의 진리를 어떻게나의 삶 속에 담아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거룩한 기회이다.

장재형목사는 마지막으로,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시대의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눈물 없는 복음은 없다”는 말을곱씹으라고 조언한다. 복음은 예수님의 눈물과 희생 위에 세워진 이야기이고, 그 예수님을 보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아픔과 사랑이 녹아 있다. 그러므로 복음을 진실로 전하고 따르는 이들이라면, 이웃의 아픔과 세상의 고통에대해서도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하고, 구원 메시지를 ‘말’만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성육신의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고통을 방관하지 않으셨고,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오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 하나님을 섬긴다면, 세상의 밑바닥을 외면해서는 안 되며, 성탄절을 축하하는 각종 이벤트도 단순히 화려한 조명과 음악, 선물 교환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오히려 소외된 이들을 초청하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는 실천 속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체현하는 것이 성탄의 본래 정신이다.

이상과 같이 네 가지 주제를 통해, 장재형목사가 해설하는 복음 메시지와 성탄의 신학적 의미를 간략히(그러나사실상은 매우 심도 있게) 살펴보았다. 그가 역설하듯, 네 복음서가 각각 다르게 펼쳐 보이는 예수님의 얼굴은 결국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귀결되며, 요한복음의 로고스 개념은 그 예수님의 신성을 철학적 언어로 드러낸다. 이 성육신 사건은 은혜와 진리의 충만을 가져오고, 어둠과 죽음의 세계에 결정적인 빛을 비추며, 성탄절은 이 구원의 드라마가 역사상으로 열리기 시작한 극적인 분기점이 된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와 신앙인이 매년 기념하는날이면서도, 해마다 새롭게 갱신되어야 할 종말론적 소망이기도 하다.

장재형목사가 결국 강조하는 핵심은, 성육신이 교리를 배우고 암기하는 지적 대상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이자모든 것의 기초”라는 사실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신비가 없다면, 우리의신앙은 결국 인간적 추측이나 종교적 열심에만 의존하게 되고,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을 만한 하나님의 역동적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성육신이야말로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가”를 웅변하며,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를 설명해주는 열쇠이며,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 성육신은 성탄절로 상징되지만, 십자가와 부활, 성령 강림으로 이어지는 완전한 구원 서사의 일부다. 우리가 이 전체 서사를 놓치지 않고 붙들 때, 비로소 성탄의 기쁨과 부활의 소망이 이어지고,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바라보는 온전한 기독교적 비전을 가질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매년 성탄절을 지날 때마다, 그저 행사나 축제의 분위기에서 스쳐 지나가지 말라”고 도전한다. 오히려 이 시기를 거룩한 묵상과 회개, 그리고 구원의 감격으로 채움으로써,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다시금 확인하고 세상에 드러내라는것이다.

결국 성탄을 맞아 기억해야 할 진리는, 우리가 전에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고, 지금도 인생의 밤을 걷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그 빛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네 복음서가 제시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합적으로바라봄으로써, 왕이신 예수, 종이신 예수, 인자이신 예수, 그리고 하늘 독수리처럼 장엄한 예수를 모두 발견할 수있다. 로고스로 계시던 분이 육신을 입고 내려오셨으며,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부활하셨고, 이제는 우리의 왕이자친구요, 구원자로 함께하신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총체이며, 장재형목사가 많은 설교와 글을 통해 거듭 강조하는 바다.

한편, 그가 “슬픈 이야기”라고 표현한 복음이 결국 기쁨의 소식으로 완성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이 끝장나고 생명의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와 존재 조건이 전복되었으며, 생멸의 법칙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이제 영원한 생명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결코 인간적 능력이나 지혜로 도달할 수 있는바가 아니며, 오직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탄은 축제 이전에 경외의사건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몸을 취하셨다는 경이로움, 창조주가 피조물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신비가 예배와 찬양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

장재형목사는 또한, 성육신을 해설할 때 “건물이나 제도의 교회가 아니라,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옷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고 걸으며, 병을 고치고 눈물을 닦아주셨다. 그분은 심지어 죄인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밥상을 나누셨다. 이런 예수님의 인간적인 친밀함은 철저한 신성(神性)과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신성의 가장 풍성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이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성육신의 영성’을 실천해야 함을 시사한다. 교회 예배당 안에만 머무르지 말고, 세상에 나아가 아파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며,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예수님처럼 다가가는 것이 성육신 영성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장재형목사는 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면모를 종합함으로써, 성육신이 우리에게 어떤변화와 구원을 가져다주는지를 다면적으로 해설한다. 네 복음서가 각자 다른 청중과 목적, 상황을 고려했지만, 한가지 공통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자, 인류의 구세주’라는 신앙고백을 일관되게 담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 사실을 철학적으로, 우주적 차원에서 풀어내는 데에 탁월한 장엄미를 보이며, 그 출발점이 “태초에말씀이 계시니라”는 명제이다. 이 말씀이 곧 로고스이고, 이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리고우리는 그 영광을 보았으며, 그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성탄절은 그 놀라운 로고스의 탄생이 역사상으로 현현한 기념일이며, 그 시작이 없었다면 십자가와 부활도 있을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성탄이 곧 복음 전체의 핵심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며, 동시에 끝까지 관통하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는 이 점을 일깨우면서, 성탄이 가져다주는 밝은 분위기와 행사가 결코 피상적으로흐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성탄의 빛은 어둠에 찾아와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니, 어둠 속에서 절망하는 이들에게 실제로 다가가는 사랑의 실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오늘날 성탄을 맞이할 때, 그 의미를 온전히 되살리려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영접하는 차원을 넘어, 교회가 이웃과 세상을 향해 “사랑의 손”을 내미는 공동체적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이교회가 성육신의 원리를 따라 세상 속에서 빛으로 존재하는 길이고, 예수님이 남겨주신 새 계명, 곧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실제로 지키는 길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아무리 교리가 화려해도, 아무리 성탄절 행사가 성대해도, 성육신의 진정한 정신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경고한다.

네 복음서의 상징적 해석, 요한복음의 로고스 개념, 성육신에서 드러나는 은혜와 진리, 그리고 어둠과 죽음의 세계를 밝히는 구원의 빛으로서의 예수님과 성탄절의 의미를 종합해 보면, 장재형목사의 메시지는 명료하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우리는 그 오심을 기념하며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그 기념은 내면의 묵상과 함께, 교회 공동체와 세상 속에서의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때 우리는 진정으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본받고, 그분의 빛을 세상 끝까지 확장하는 도구로 부름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탄절은 단지 한 해를 마무리하며 보내는 마지막 축제가 아니라, 복음의 핵심 원리를 되새기고, 새로운해를 맞이하여 신앙인답게 살아갈 결단을 하는 영적 출발점이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을 완전히 바꾼 것처럼, 이 땅에 여전히 남아 있는 어둠과 고난의 현장에서도 우리는 똑같은 방식으로 낮아져 섬기고, 사람들과 함께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구체화해야 한다.

장재형목사가 거듭 강조하는 대로, 성육신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예수님이 교회 안에, 신앙인 안에 거하셔서그들과 함께 움직이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이 성육신적 동력을 가지고 세상으로 파송되어야 하며, 그것이 “신앙의 참된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왕이신 예수님과 종으로 오신 예수님, 모든 인류의 인자 예수님과 하늘 독수리로임하신 예수님을 함께 바라보며, 우리의 구세주가 얼마나 광대하고도 친밀하신 분인지를 재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성육신에서 시작된 복음 서사를 온전하게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 복음이 내면의 변화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 나아가 전 세계 열방으로 확산되어 갈 때, 성탄의 빛은 진정으로 어둠을 몰아내고 수많은 사람을하나님께로 이끄는 생명의 능력이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장재형목사의 복음 이해는 신학적 깊이와 선교적 열정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네 복음서를 아우르는 복합적 해석, 헬라 철학과의 접점으로서의 로고스 개념 도입, 성육신의 구원사적 의미, 그리고 어둠속에 임한 빛과 성탄절의 실제적 의의라는 네 가지 주제는 결국 하나의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는초대를 건넨다. 그 초대에 응하는 이들은 성탄절에 단지 전통과 의무를 이행하는 차원을 넘어, 자신이 믿고 따르는 예수님이 누구이며,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목적이 오늘 나의 삶과 공동체에 어떤 변화를 요구하는지까지 깊이 돌아보게 된다.

결국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역사의 한가운데로 뛰어드신 사건이자, 인간이 더 이상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절망 속에서 만난 희망의 실체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이 완성되었지만, 그 시발점이 되는 성탄절을 통해 우리는 해마다 복음의 핵심인 성육신을 곱씹으며, 복음의 현실성을 재차 확인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으셨기에, 우리의 죄와 아픔과 고통을 실제로 지셨기에,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에 갇혀 살 필요가 없다. 이 메시지를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 공동체가 곧 교회이며, 교회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성육신의 진리,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을 세상에 펼쳐 보이는 것이다.

장재형목사의 가르침은, 이러한 성육신 신앙이 추상적인 교리로만 머무르지 않게 하며, 우리로 하여금 인간적 삶의 구체적인 한계와 고난 현장 가운데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현하도록 자극한다. 성육신이야말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시고 우리 삶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의 가장 극명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에 나타난 그 ‘로고스’가 곧 예수님이며,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는 선언을 날마다 체험하도록 부름받은 것이 오늘날 신앙인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로써, 장재형목사가 성육신을 중심주제로 하여 전개하는 복음 메시지는 우리를 다시금 예수님의 길로 초대한다. 그 길은 때로 좁고 험난하며, 십자가가 기다리는 길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부활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보장한다. 성탄절은 그 길의 시작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우리는 이 절기를 통해 과거에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는 동시에, 우리 안에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경험하고, 장차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하는 삼중적 시선을 갖는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점에서 성육신이 매해 새롭게 발견되고, 깊어지고, 확장되어야 한다고 거듭촉구한다.

이처럼 왕이신 예수, 종이신 예수, 인자이신 예수, 독수리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신 예수라는 네 개의 상징 이미지를 아우르며, 태초의 로고스가 육신으로 오신 사건의 의미를 풀어내는 장재형목사의 복음 이해는 단순한 교리 설명을 넘어, 삶의 변화와 선교적 실천까지 아우르는 포괄적 틀을 제시한다. 우리가 이 메시지를 듣고 따를 때, 성탄절은 그저 연말 한낱 행사나 문화적 축제에 머무르지 않고, 복음의 전모를 대면하는 경이로운 시간, 그리고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는 경건한 결단의 시간이 될 것이다.

결국 성육신은 교리이자 삶이고, 신비이자 실제이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한 증언이자 초대다. 이 점을 깨달을 때, 신앙인은 더 이상 자신만의 영광이나 세속적 목표를 추구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기쁨과 빛을 나누는 사명을 수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장재형목사가 성탄절과 요한복음 1장의 성육신메시지를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궁극적 초대이자 권면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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