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절 기간 장재형(장다윗)목사가 전한 요한복음 2장과 18장(특히 요 18:12-21), 더 나아가 요한복음 8장과 사도행전 등에서 나타나는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그 의미와 배경,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보이신 자기 희생과 성전 청결 사건, 당시 유대 종교 권력자들과의 갈등, 십자가와 부활의 연관성, 그리고 그 모든 맥락에서 오늘날 교회와 우리 안에 주어진 메시지를 장재형목사의 관점 혹은 신앙적 해석을 하나의 흐름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한 개의 소주제로만 통합하여 정리하는 것이며, 중간 제목이나 다른 구분 없이 하나의 흐름으로 진행될 것이다.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라고 하신 말씀(요 2:19)은 복음서 전체 맥락에서 극도로 중요한 선언이자, 당시 유대 지도층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이고 도전적인 말씀이었다. 이 사건의 근본 배경을 살피면,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 벌어지고 있던 매매 행위, 제물 판매, 돈 바꾸는 사람들의 자리잡음 등은 단순한 ‘성전의 상업화’가 아니라, 대제사장과 그 가문이 권력과 재물을 위해 성전을 철저히 이용하던 구조적 부패였다. 특히 안나스와 가야바, 그리고 그 가문은 성전 제사를 독점적으로 운영하면서 검열관을 두어 성전 밖에서 사 온 제물에 ‘흠’을 잡아들였고, 결국 모든 이가 성전 안에서만 과도한 금액으로 제물을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는 가난한 자들의 등골을 휘게 했고, 유대 백성으로서는 죄사함을 얻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제물을 성전 안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주님의 “성전을 헐라” 발언은 바로 그러한 종교 권력자들의 치부와 부패를 강타하는 예언적 선포였다. 예루살렘 성전을 우주의 중심이며, 유대 종교의 절대 권위로 여겼던 자들에게 이 선언은 얼마나 불손하고 위험하게 느껴졌겠는가.
장재형목사는 여러 강론과 글을 통해, 오늘날 이 말씀이 우리 안에도 여전히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고 강조해왔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죄성은 ‘자기중심성’에 뿌리를 두고 있고, 그것이 바로 ‘나만 옳다’고 하며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태도, 혹은 내 안에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으로 삼아 성전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깨지는 것을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고대 유대 종교 권력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우주의 중심이며, 누구든지 성전과 제사장 체계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현대를 사는 우리들 역시 눈에 보이는 건물이나 제도, 혹은 내적 신념체계를 절대화하여, 다른 이들과의 화해를 거부하고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완결적 태도에 빠지기 쉽다.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모든 자기중심과 완고함을 내려놓아라. 내가 삼일 만에 새로운 성전을 일으키겠다. 그 성전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열리는, 영적이고 보편적이며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의 참된 성전”이라는 선언이다.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건물이 아니라 영의 예배와 사랑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된다.
요한복음 2장의 이 사건 뒤, 예수님은 실제로 안나스와 가야바 가문을 비롯한 대제사장 세력으로부터 거센 반감을 사게 되었고, 그것이 요한복음 18장 이후 예수님의 체포와 재판, 십자가 처형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예수님을 붙잡아 밤중에 안나스에게로 데려간 일(요 18:12-13)은, 그들이 예수님을 ‘단순한 이단 교사’ 정도로 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위와 경제적 기반을 뒤흔드는 심각한 도전자로 인식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성전을 헐라’ 했다는 발언을 거짓 증인까지 세워가며 문제 삼았고, 이는 스데반의 순교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 ‘성전을 훼파하려 한다’는 죄목으로 그대로 이어진다(행6:13-14). 즉 예수님과 스데반은 둘 다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 모세가 전해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한다”라는 모함을 받았고, 그것이 치명적 재판의 빌미가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가장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이처럼 종교 권력과 부패에 정면으로 맞서시고, 궁극적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진정한 성전’과 ‘진정한 예배’를 여셨다는 사실이라고 말한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예배의 장소이지만, 그것이 제도나 인간의 경제적 욕심, 자기 의에 가득 차게 되면 이미 하나님을 떠난 ‘빈 껍데기’가 되기 쉽다. 예수님이 친히 몸소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하게 하시고(요 2:13-17), 그 성전 권력의 부패를 질타하실 뿐 아니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선포하실 때, 그에 대한 저항은 당연했다. 그 성전 체계로 이득을 챙기던 이들은 예수님을 절대 가만두지 않았으며, 결국 그를 십자가에 내어주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예수님은 육체라는 성전이 헐리시는 고난을 기꺼이 감당하셨고, 부활로써 새 성전의 실체를 보여주셨다.
이때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행하신 ‘성전 청결’은 단지 건물 청소 정도가 아니라, 곧 스스로의 죽음과 결부되는 강력한 예언적 행동이었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하신 말씀은, 곧 본인 자신의 몸을 가리키신 것이며(요 2:19-21), 동시에 예루살렘 물리적 성전 체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즉 인류 모두를 향해 열린 구원의 문을 시사하는 말씀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렇게 “헐라”고 하시는 말씀 속에는 “네가 붙들고 있는 자기중심의 제도, 탐심과 권력, 오만과 불의를 깨뜨려라. 내가 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길을 열겠다”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 음성은 2천 년 전 종교권력에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제도화되고, 때로 세습과 재정적 욕망, 권력 지향적 문화에 물들기 쉬운 지금 이 시대의 교회와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이어 복음서에서 또 다른 인상적인 본문으로, 요한복음 8장에 나타나는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여야 한다(레 20:10; 신 22:20-24).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대로라면 이 여인을 돌로 쳐야 하는데, 선생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며 예수님을 시험했고, 사실상 율법을 지키느냐, 자비를 택하느냐를 놓고 예수님의 태도를 공격하려 했다. 예수님의 대답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였고, 그것은 ‘율법이 말하는 죄와 벌의 도식’을 넘어서는 ‘자비와 용서’의 법, 곧 복음의 핵심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직접 땅에 쓰셨던 내용이 무엇인지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전통적으로 “용서하라” 혹은 “너희의 죄를 보라” 혹은 “너희가 지키지 못하는 율법은 무엇이냐” 등으로 추정되어 왔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이 행동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토라’(오경)를 완전히 무시하거나 폐기하신 것이 아니라, 토라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하나님의 마음, 즉 긍휼과 사랑을 실현해 보이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당시 종교권력 입장에선 “율법을 고치려 한다”는 반역적 시도로 볼 수 있었고, 스데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 죄목이었던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이토록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과 자비의 실제를 보이셨기에, 부패한 종교권력, 형식적 율법주의에 얽매인 사람들에게서 철저히 배척당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우리가 이 사실을 놓칠 때마다 신앙이 경직되고, ‘자기 성전’을 절대화하며, 교회가 사랑과 용서, 성령의 자유를 잃어버린 ‘장사하는 집’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가 스스로 만든 성전을 “우주의 중심”으로 삼아 절대화하기 시작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은 사라지고, 율법적 잣대만 남아 서로를 판단하기 쉽다. 그리고 이는 예루살렘 성전 체제가 걸어갔던 비극적 길을 교회가 되풀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성전”의 서막을 열어 준다. 이전에는 단 한 명의 예언자도 세워지지 않았던 영적 가뭄의 시기에 살던 자들에게, 성령이 임함으로써 120명의 제자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영을 체험하고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 고대 유대인들에겐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몇몇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었지만, 이제는 주님의 자기 희생과 부활로 말미암아 “남종과 여종에도 성령을 부어 주시겠다”(욜 2:28-29)는 예언이 성취되었고, 사회적으로 가장 천대받던 계층에 이르기까지 차별 없이 성령이 임하게 되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을 가리켜 “주님께서 스스로 성전을 허무심으로 우리에게 열어 주신 은혜의 시대가 곧 성령의 시대”라고 말한다. 예루살렘이라는 특정 장소, 혹은 그 성전을 운영하는 대제사장 체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열리게 된 새로운 지평 속에서 모든 믿는 자가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로써 교회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배타적 종교 체제가 아닌, 예수님을 모퉁잇돌 삼아 한 몸으로 지어져 가는 영적 공동체가 되었다(엡 2:20-22). 바울이 에베소서 2장에서 “주께서 친히 우리의 화평이 되사 둘로 하나를 만드셨다”고 말할 때, 그 “둘”은 유대인과 이방인이지만, 더 크게 보면 성전의 ‘제도적 담’과 성령의‘자유’ 사이의 엄청난 간격, 혹은 자기중심성에 찌든 온 인류의 장벽을 의미하기도 한다. 주님은 십자가로 그 장벽을 허무셨고, 새 창조를 여셨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장재형목사는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이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대 유대인들처럼 건물로서의 성전을 절대화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과 교회 공동체 안에 은근히 자리 잡은 ‘안나스와 가야바 가문’ 같은 병리적 구조를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조직화되고 대형화될수록, 혹은 오랜 전통을 가진 교회일수록, 개인과 기관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세습과 재정적 문제, 권력구조 문제가 생겨나기 쉽다. 이런 현실 앞에서 예수님이 성전을 뒤엎으셨던 결단과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던 뜨거운 마음, 그리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다시 세우리라.”는 도전적 메시지를 우리는 어떻게 새길 것인가.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십자가 중심의 영성’을 말한다. 예수님이 ‘성전 된 자기 육체’를 헐리심으로 우리에게 참된 생명의 길을 여셨고, 그 길은 곧 자기중심적 죄성을 십자가에서 내려놓고, 이웃과 화해하고 사랑의 섬김에 헌신하며, 복음의 자비와 자유를 실현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죽으신 사건이지만, 그 안에 담긴 “자기를 비우는 사랑”은 결국 부활과 성령 강림으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를 묵상하며 살아가는 교회라면, 더 이상 ‘돌 성전’을 지어 놓고 그 성전을 통해 자기 이득을 취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세상 한가운데서 그리스도의 희생과 용서를 실천해야 한다. 신앙이란 예배당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을 넘어, 삶의 전 영역에서 “성전을 헐라”고 하신 주님의 길—곧 자기 비움과 겸손, 사랑의 섬김—을 따르는 것이다.
더욱이 “성전을 헐라”는 메시지는 오늘날 개인적 차원에서도 깊은 울림을 준다. 누구나 마음속에 ‘내 것’이라 여기는 절대 불가침의 영역이 있고, 이것이 곧 자기만의 ‘성전’이 된다. 그것이 교만일 수도 있고, 물질에 대한 집착이나 자기 욕망, 혹은 가족과 민족, 국가에 대한 과도한 자의식일 수도 있다. 장재형목사는 그러한 심령 깊은 곳에 뿌리내린 ‘자기성전’을 깨뜨리지 않으면, 결국 예수님이 본보기로 제시하신 십자가의 정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본다. 예수님이 안나스의 집에 끌려가고, 가야바와 서기관, 바리새인들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며, 급기야 십자가의 죽음을 맞으신 것은, 단순히 그들의 체면이나 종교적 관습을 거슬렀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붙드는 그 잘못된 성전을 내려놓으라”고 분명히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 안에서만 신앙생활을 하는 듯 보여도, 정작 우리 안의 ‘성전’은 내려놓지 않은 채, 남을 정죄하거나 자신의 교리를 우주의 중심처럼 강요한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이처럼 요한복음은 초반부(2장)부터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과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배치하여, 후반부(18-19장)에서 예수님이 실제로 체포되고 고난받으시는 장면과 연결 짓는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왜 예수님이 체포되었고, 무엇과 대결하셨으며, 무엇 때문에 죽으셨는가?”라는 물음을 자연스레 던지도록 만든다. 요한은 매우 자세하게 안나스에게 끌려간 이유, 대제사장이 제자들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묻는 이유, 스데반의 죽음과 비슷한 죄목 등, 배후에 도사린 종교권력의 속성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예수님이 새롭게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이 결국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 성전’의 건축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결국 예수님의 육체가 헐림으로써, 다시 말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부활과 함께 성령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그 성령 안에서 누구든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이 요한복음의 결론이다.
장재형목사는 말씀을 전할 때, 이 복음의 메시지를 단지 과거 역사적 사실이나 ‘예수님이 하신 위대한 업적’으로만 두지 말고, 지금 내 삶, 그리고 오늘날 교회 현실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를 심각하게 물어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교회가 여전히 사람들의 눈에 훌륭해 보이는 건물을 지으려 애쓰고, 때때로 그 안에서 세속적 가치들이 난무하며, 교권 싸움이나 재정 비리, 혹은 파벌과 분열 등으로 얼룩진다. 이는 2천 년 전 예루살렘 성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습일 수 있다. 그래서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도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진정한 돌이킴, 곧 회개가 일어날 때 교회는 참된 ‘기도하는 집’,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으로 거듭날 수 있다. 거듭남은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자신의 자아를 한 번도 헐어 본 적이 없다면, ‘성전된 육체’를 허무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길을 아직 따르지 못한 것이다. 진정한 복음은 신념이나 지식으로만 머무는 게 아니라, 내 욕심과 교만으로 세워 놓은 ‘성전’을 십자가에 내려놓는 결단으로 구체화된다.
이와 관련해서 장재형목사가 자주 인용하는 것이 에베소서 2장의 “화목” 개념이다. 바울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둘로 하나를 만드셨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엡2:14-15)라고 한다. 주님께서 하나 되게 하시려고 자신을 희생하셨고, 그 결과로 종교적 장벽, 인종적 차별, 신분의 차이 등이 허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서로 다투고 갈라서는 모습, 혹은 세상 한가운데서 분쟁이 끊이지 않는 모습은, 예수님이 자기 몸을 찢어 여신 그 화해의 길을 무시하는 처사다. 우리는 “왜 저들과 화해해야 하는가?”라고 불평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십자가의 메시지는 “주님이 먼저 헐리셨기에”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던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고, 또 원수 된 자들과의 담이 허물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결국 성전을 헐라는 주님의 요청은 “너도 이제 헐려라. 그리스도께서 너를 위해 희생하신 것처럼, 네가 안고 있는 배타성과 자만, 불의한 구조를 내려놓고, 상대를 품어라”는 명령과 다르지 않다.
또한 성령의 시대가 열렸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고자 해도, 우리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초대교회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으나, 막상 ‘네가 끝까지 나를 따를 수 있느냐?’라고 했을 때 도망가고, 예수님의 체포 순간에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사도행전 2장에 이르러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며, 과거에 그토록 두려워하던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목숨의 위협조차 달게 받으며,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20)고 고백한 것이다. 이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장재형목사는, “성전을 헐라”는 말씀과 “성령이 임하심으로써 열리는 새 성전”을 떼어 놓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율법 체제를 무너뜨리고, 제도적 성전을 넘어서는 길이 열린 것은 결국 주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라는 ‘성전’을 허무시고 부활하신 뒤, 성령을 부어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를 때, 성령을 구하고 성령의 힘을 의지함으로써만 “새 성전”을 살아낼 수 있다. 인간적 결심과 노력만으로는 안나스와 가야바 같은 세상의 부패, 혹은 내 안에 자리 잡은 욕심을 이길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가 성전을 헐고(곧 자기 중심성을 내려놓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화해, 섬김의 공동체를 세우도록 도우신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이 십자가 중심의 복음,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진정으로 사로잡힐 때, 더 이상 ‘거짓 종교’의 권력이나 경제적 이해관계에 매이지 않고, 온 세상을 품는 ‘하나님의 성전’으로 확장된다고 강조한다. 이 하나님의 성전은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사신 우리 각 사람과 공동체 안에 임하는 영적 실재이며, 그 안에서 모든 민족과 계층, 남종과 여종, 늙은이와 젊은이가 함께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살아가는 새로운 나라다. 초대교회가 실제로 흑인, 백인, 이방인, 유대인, 남성, 여성, 종, 자유인 모두가 동등하게 한 자리에서 떡을 떼며 모인 것은, 1세기 당시 문화로는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십자가가 헐어버린 장벽의 결과였고, 성령이 이루신 기적이었다. 오늘날 교회 역시 그 길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제도적 성전, 인간의 이기심과 자만으로 세워진 구조들, 혹은 종교적 형식만을 추구하는 신앙을 헐어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피 흘림이 없는 형제애와 상호 돌봄의 교회로 자라나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 역사에는 숱하게 “성전을 다시 세우겠다”는 미명 아래 인간적 욕심을 세워 온 경우가 많았다. 교권과 세습, 부의 축적, 교회 내부의 파벌과 다툼, 세상 정권과 결탁 등이 반복되어 왔다. 이런 모습은 “성전을 헐라” 하신 주님의 음성을 거부하는 행위다. 또한 어떤 개개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며 여전히 자신의 옛 모습이나 세상의 가치관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외적으로는 예배드리고 봉사를 하며 ‘신앙인’으로 자처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사랑 대신 정죄와 편 가르기에만 빠져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 주님의 말씀 “너희 안에 있는 성전을 헐어라. 그리고 삼 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는 경고처럼 다가온다. 그 삼 일 만의 부활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권능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이다. 그러나 앞서 헐려야 다시 세워진다. 아예 내려놓지 않고는 새로 세우심이 일어날 수 없다. 장재형목사는 이 원리가 교회 개혁과 각 사람의 내적 성숙 모두에 적용된다고 본다. 타락한 교회는 철저히 회개하며 기존의 욕심과 구조적 부조리를 무너뜨려야 하고, 개인적으로도 내가 붙잡고 놓지 못하는 죄성을 완전히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부활의 능력이 교회와 삶을 새롭게 세운다.
“성전을 헐라”는 선언은, 요한복음에서 매우 도전적인 본문이지만, 교회론과 구원론, 그리고 성령론을 깊이 통합해 주는 핵심 구절로 자리 잡는다. 예수님이 안나스와 가야바의 손에 붙잡혀 재판을 받으면서도 “내가 공공연히 세상에 말하였다. 은밀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주님이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이익이나 야망을 위해 진리를 감추신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요 18:20). 주님은 끝까지 십자가로 나아가는 길을 통해 진정한 성전을 세워 주셨다. 그 성전은 “네 몸이 성령의 전”(고전 6:19)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으로 계승되고,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는 주님의 가르침으로 완성된다.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자기 희생과 사랑 안에서 열리는 공동체가 곧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가르침을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가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교회 세습 문제나 재정 문제, 성장 지상주의와 교권 다툼 등은 예루살렘 성전을 통해 오직 자기를 확장하려 했던 안나스와 가야바의 정신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지적한다. 심지어 개인 차원에서도, 내 신앙의 목표가 정말 주님을 닮아 가고 복음을 전파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종교적 위로를 얻고 종교라는 체계를 이용해 자신의 만족과 명예를 추구하는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이 돌아봄이 없다면, 종교라는 간판 아래서도 우리는 무참하게 타인을 정죄하고, 혹은 나보다 약한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세상 권력과 타협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참된 복음은 언제나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십자가의 자리를 지향하고, 그 결과로 성령의 풍성한 열매가 맺히게 된다(갈 2:20, 갈 5:22-23).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곧 “네가 그 십자가에 동참하라. 그리고 부활의 소망을 붙들라”는 초청이며, 이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은 종국에는 세상의 기득권이나 부패한 체제를 기쁘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빛이 어둠을 드러내고, 참 진리가 거짓 종교를 폭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희생과 고난, 심지어 순교의 길이 따를 수 있으나, 바로 거기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참된 생명이 피어난다. 교회사가 증언하듯, 스데반의 순교가 기독교 박해의 서막이 되었지만, 동시에 흩어진 제자들이 더 넓은 땅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행 8:1-4). 이렇게 교회는 늘 ‘성전을 헐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세상의 저항을 받았으나, 그때마다 십자가를 붙들고 성령의 힘을 입어 부흥의 길, 새 창조의 길을 걸어왔다.
따라서 우리 역시 “왜 예수님이 당시 종교권력과 충돌했으며, 무엇 때문에 죽으셨는가”라는 질문을 외면하지 말고, 그 답이“성전을 헐라”는 파격적 메시지와, “율법을 고치겠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큼 ‘사랑과 자비’의 복음을 전하셨기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사랑은 율법보다 크고, 자비는 심판을 이긴다(약 2:13)는 복음의 선포가 예수님의 가르침 전반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분은 “네가 이것을 깨닫고 실천하라”라고 촉구하신다. 만일 우리가 이 메시지를 진정으로 수용한다면, 교회 안의 수많은 벽들이, 세상의 차별과 증오가, 또 내 안의 고집과 욕망이 허물어질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약속하신 대로, 삼 일 만에 다시 세워질 ‘새로운 성전’ 곧 십자가와 부활의 공동체가 이 땅에 드러날 것이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교회의 미래이고, 동시에 교회가 과거로부터 계속 이어져 내려온 본질적인 부르심이라고 해석한다. 교회는 건물도, 특정 종파도, 인간적 권력을 의미하지 않으며,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의 자기 헌신을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사람들은 사회적 약자를 배척하기보다 오히려 품고 섬기며,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는 사랑으로 일치함을 보여준다. 현대 교회가 때로는 이 부르심을 망각하고 있을지라도, 성령의 역사는 여전히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교회를 새롭게 빚어 가신다. 교회의 사명이란 세상의 가치관을 성전 안에 그대로 들여와서 성공과 번영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전을 헐라”는 주님의 선포대로, 세상의 모든 장벽과 불의를 허물고 새 창조의 길을 펼치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은 우리의 기도가 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이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내 안의 성전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복종하는 자리에 서는 태도다. 예수님이 깨끗하게 하신 성전은 곧 “만민이 기도하는 집”(마 21:13; 사 56:7)이며, 그곳에선 기득권 세력이나 권위주의적 질서가 아니라, 철저히 낮아지고 소외된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이 흐른다.
요한복음 2장과 18장을 중심으로,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당시 종교 권력자들과 갈등을 일으킨 직접적 이유이며, 왜 예수님이 붙잡혀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셨는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관건이 된다. 또 요 8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 그리고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이 사람이 성전을 헐려 한다”는 죄목으로 돌에 맞아 순교하는 장면 등은, 율법적•종교적 제도의 절대성에 도전하여, 사랑과 자비, 성령의 자유를 선포하는 복음이 과연 얼마나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는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반발과 거부 속에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심으로, 궁극적으로 참된 성전과 새 시대를 여셨다. 오늘의 교회와 성도는 이 사건을 교회사적 과거가 아닌 살아있는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결코 지난 옛이야기가 아니며,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선포되고 있다. 예수님의 몸처럼 우리 안에 있는‘자기중심의 성전’을 헐어낼 때, 주님은 우리 공동체 안에 새 성전을 일으키신다. 그 성전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 안에서 하나 되고, 성령을 따라 행하며,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는 예수님의 교회이며,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복음의 능력이 체현되는 현장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핵심을 붙들고 여러 설교와 저서를 통해 거듭 강조해왔다. 교회가 아무리 성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어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과 성령의 자유가 없다면 이미 그곳은 죽은 성전이다. 반면 눈에 보이는 건물이 변변치 않고, 숫자가 적어도, 그 안에서 십자가의 사랑이 실천되고 성령의 불이 살아 있다면, 거기가 바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 성전이다. 결국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 성전이며,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길이 살아 움직이느냐가 관건이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을 우주의 중심이라 맹신했던 옛 유대인들의 모습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자기중심성과 우월주의, 형식적 종교성이 가득 차면, 정작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조차 거부하고,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비극을 초래한다. 이것이 과거 유대 지도층의 모습이었고, 오늘날 우리도 같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성전을 헐라”는 주님의 요청에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내 마음과 교회, 그리고 교단과 기독교 문화 안에 잘못 세워진 ‘거짓 성전’은 없는지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면 순종으로 헐어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님이 다시 세우실, 삼 일 만의 부활과 함께 시작되는 새 성전을 소망해야 한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은 자기 희생과 낮아짐, 그리고 성령 안에서 열리는 보편적 사랑이었다. 그것을 본받는 것이 성도를 향한 가장 본질적 요청이며,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만일 우리가 복음의 핵심을 잃고 외적으로 화려한 모습만 추구하며, 제도적 성전 체제에 안주한다면, 2천 년 전 부패한 종교 권력자들과 다를 바 없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성전을 헐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 사랑과 용서, 섬김을 실천한다면, 거기서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꽃필 것이다. 그 생명의 역사가 바로 ‘새 성전’의 모습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메시지를 반복해서 강조하면서, 성도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진심으로 자기 헌신과 회개,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갈망하는 자리로 나아가길 촉구해 왔다. 그가 강조하는 점은 언제나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너무나 크고, 그 은혜 안에서 우리도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성을 내려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이미 그 길을 열어 두셨고, 성령께서 동행하신다는 약속이 있으니, 우리는 그 길로 걸어갈 수 있다.
요한복음 2장의 성전 청결과 “성전을 헐라”는 선언, 그리고 요한복음 18장(안나스와 가야바의 음모, 예수님의 체포와 심문)에 이르는 긴 흐름은,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셔야만 했는지, 무엇이 참 성전인지, 예배와 율법의 본질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써 그 놀라운 복음은 모든 장벽을 허물고, 차별 없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는 새로운 공동체를 낳았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교회가 이 복음의 정신을 온전히 회복한다면 과거와 같은 부흥과 생명의 역사를 다시금 체험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교회 역사상, 진정으로 십자가를 붙들고 성령의 임재를 간구할 때마다, 늘 새로운 각성과 개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다시 세우리라” 하신 말씀은 결코 파괴적 선언이 아니라, 회복과 재창조의 선언이다. 주님이 친히 자기 몸을 찢고 죽으심으로 그 선언을 이루셨고, 부활과 성령 강림으로 그것을 완성하셨으며, 이제는 우리에게 그 길을 따르라고 초청하신다. 그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자, 교회의 궁극적 사명인 것이다. 그리고 이 길 위에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종교 권력자들의 반발이나 세상의 거부에 부닥칠 수도 있지만, 결국 주님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화평을 얻게 될 것이다. “성전을 헐라”는 말씀을 오늘 다시 마음에 새기며, 우리 안과 교회 안에 어떤 성전을 유지해 왔는지, 그리고 주님의 새 성전 안에 들어가기 위해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깊이 묵상해야 한다. 이는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고민하며 결단해야 할 문제이며,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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