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야는 단지 모래와 돌의 지형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어떤 방향으로 기울어 있는지를 드러내는 거대한 무대다. 장재형(장다윗, 올리벳대학교 설립)목사가 고린도전서 10장을 중심으로 풀어낸 설교의 결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들려준 경고는 과거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종교적 예화로 소비하라는 요청이 아니다. 오히려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거울’로 세워, 지금 이 순간의 신앙 공동체가 자신을 비춰 보게 하는 예언적 장치다. 이미 세례를 받았고 성찬에 참여하며 말씀을 안다고 해서, 혹은 영적 체험을 기억한다고 해서, 스스로 ‘서 있다’고 단정하는 순간 위험은 시작된다. 장재형목사는 고린도전서 10장 12절의 문장을 설교의 중심 축으로 세운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이 한 구절은 신앙의 가장 오래된 유혹, 곧 영적 교만과 자만을 정면으로 겨눈다. 그리고 31절의 선언,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삶의 방향을 제시하며, 경고와 목표를 한 호흡 안에 엮어 낸다. 경고가 목적을 잃으면 두려움만 남고, 목적이 경고를 잃으면 낭만적 구호만 남는다. 장재형목사가 고린도전서 10장을 “깊이 있게 공부해야 할 중요한 장”이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이 장이 신앙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정밀한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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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꺼내 든 예시는 충격적이다. 그는 “우리 조상”이라 부르는 이스라엘이 구름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갔으며(고전 10:1), 영적 양식과 영적 음료를 먹고 마셨다고 말한다. 그들은 마치 홍해 사건을 통과하며 죽음과 생명의 경계를 건넌 사람들처럼, 공동체적 세례의 경험을 했다. 광야의 만나와 반석에서 난 물은 단순한 생존의 식량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매일 입에 올리는 증거였다. 바울은 그 반석을 그리스도와 연결한다(고전 10:4). 그런데도 그들 중 다수가 광야에서 무너졌다. 여기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은혜의 부재가 아니라, 은혜를 경험한 후에도 인간의 마음이 얼마든지 다른 방향으로 굽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에서 현대 신앙인의 ‘자동조종’ 신앙을 흔든다.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연륜, 신학적 지식, 사역의 성과, 공동체 내에서의 인정은 성숙의 표지가 될 수 있지만 성숙 그 자체는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이 마음을 무디게 만들고, 회개의 필요를 지우며, “이제는 괜찮다”는 자기기만을 강화할 수 있다. 그러니 바울이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다. “너희는 정말로 서 있는가, 아니면 서 있다고 믿고 싶은가.” 광야는 이 질문을 가장 잔인할 정도로 정직하게 드러내는 자리다.
광야 이야기의 힘은 생생한 구체성에 있다. 바울은 “이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된다”(고전 10:6)는 취지로, 실패의 장면들을 하나씩 소환한다. 장재형목사가 설교에서 반복해 상기시키는 네 가지 함정은 우상숭배, 음행, 주를 시험함, 원망이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금지 목록이 아니라, 한 공동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보여 주는 심층 지도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궁극의 가치로 세우는 행위이며, 음행은 육체적 방종을 넘어 관계의 질서와 언약의 신실함을 파괴한다. 주를 시험하는 태도는 하나님을 신뢰의 대상으로 모시지 않고, 자신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끌어내린다. 원망은 은혜의 기억을 지우고 현재의 결핍만 확대하여, 공동체의 언어를 독으로 바꾼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다. 우상숭배가 욕망의 중심을 바꾸면, 욕망의 확장은 음행과 같은 형태로 터져 나오고, 욕망이 충족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시험하고, 결국 불평과 원망이 공동체의 공기가 된다. 장재형목사는 이 연결고리를 보여 주며, 광야의 실패가 단지 개인적 추락이 아니라 공동체적 붕괴의 메커니즘임을 강조한다.
우상숭배의 대표 장면인 금송아지 사건(출 32장)은 ‘기다림’에 실패한 이야기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백성은 불안과 조급함을 견디지 못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바꾸어 버렸다. 신앙이란 본질적으로 ‘아직 보지 못하는 것’을 신뢰하며 걷는 여정인데, 그들은 신뢰의 빈자리를 즉시 대체물로 채우려 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오늘의 물질주의와 연결한다. 현대의 금송아지는 금속으로 빚어진 우상이 아니라, 숫자와 성과와 비교의 언어로 세워진다. 통장 잔고, 조회 수, 팔로워, 학벌, 직함, 실적, 부동산의 면적, 남보다 앞서 있다는 감각이 신의 자리를 차지할 때, 우리는 이미 우상 앞에 절하고 있다. 더 위험한 것은 우상이 종종 ‘종교적 언어’로 포장된다는 점이다.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만 해석하고, 성과를 은혜의 증거로만 단정하면서, 정작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겸손과 정의와 사랑의 무게를 외면할 때, 금송아지는 교회 안에서도 조용히 자란다. 장재형목사는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놀았다”(고전 10:7의 배경)라는 표현을 통해, 우상숭배가 단지 사상적 오류가 아니라 삶의 리듬 전체를 바꾸어 버리는 중독적 축제임을 드러낸다. 하나님 없이도 즐길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잔치가, 결국 하나님을 떠난 허기만 더 키우는 잔치가 될 수 있다는 경고다.
이 지점을 더 선명하게 해 주는 예술적 증언으로, 프랑스 화가 니콜라 푸생의 작품 ‘금송아지를 숭배함(The Adoration of the Golden Calf)’을 떠올릴 수 있다. 화면 한가운데에 놓인 우상은 황금빛으로 번쩍이지만, 그 주변을 둘러싼 군중의 몸짓은 질서가 아니라 흥분의 소용돌이다. 춤과 음악과 제의가 뒤섞인 열광은 잠시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듯 보이지만, 그 결속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아니라 욕망을 향한 동조에서 나온다. 푸생은 광야의 한순간을 단지 종교적 사건으로 그리지 않고, 인간이 불안과 욕망을 다루는 방식의 비극으로 포착한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거울’의 기능은 바로 이런 것이다. 그림 속 군중을 바라보며 우리는 “그들은 왜 저렇게까지 했는가”라고 묻기 전에, “나는 무엇을 절대화하며 살아가는가”를 먼저 묻게 된다. 우상의 형태는 시대마다 달라지지만, 우상을 만드는 마음의 구조는 놀라울 만큼 비슷하다.
음행의 문제는 더 날카롭게 공동체의 신뢰를 붕괴시킨다. 민수기 25장의 사건처럼, 이스라엘은 모압과의 관계 속에서 성적 타락과 우상숭배를 함께 경험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음행을 따로 언급하는 이유는, 성적 죄가 개인의 은밀한 실수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하기 때문이다. 장재형목사는 음행을 단순한 ‘금욕의 실패’로 축소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언약의 언어를 훼손하는 배신, 곧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볍게 만드는 태도와 연결한다. 사랑이 소비로 전락하고, 타인이 욕망의 도구로 격하되며, 몸이 경외의 장소가 아니라 쾌락의 시장이 될 때, 신앙 공동체는 내부에서부터 무너진다. 특히 고린도라는 도시가 성적 방종과 종교적 혼합주의가 만연한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바울의 경고는 단순한 도덕주의가 아니라 ‘복음의 정체성’에 관한 선포다. 복음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부르며, 그 부름은 몸의 윤리와 관계의 윤리를 포함한다. 장재형목사는 현대의 디지털 환경, 즉 이미지와 자극이 손끝에 붙어 있는 시대에 이 경고가 더욱 절실해졌다고 말한다. 자극은 빠르지만 사랑은 느리고, 소비는 즉각적이지만 언약은 인내를 요구한다. 광야의 교훈은 이 시대의 속도에 맞서, 관계를 거룩하게 지키는 느린 용기를 회복하라고 촉구한다.
주를 시험하는 죄는 겉으로는 신앙의 열심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교묘하다. 이스라엘은 물이 없을 때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를 따져 물으며 시험했다(출 17장). 그러나 그 질문의 바닥에는 신뢰가 아니라 조건부 계약이 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가 원하는 증거를 보여 준다면 믿겠다”는 태도는 하나님을 주권자로 모시지 않고, 고객을 상대하는 서비스 제공자로 전락시킨다. 예수께서 광야 시험에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마귀의 요구를 거절하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조종과 거래의 관계가 아니라 사랑과 신뢰의 관계임을 드러낸다. 장재형목사는 신앙인이 조급함에 사로잡힐 때, 기도가 간구가 아니라 압박이 되고, 기다림이 성숙의 훈련이 아니라 불신의 증거가 되기 쉽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당장”이라는 단어로 하늘을 재촉한다. 그러나 신앙은 종종 ‘지연’ 속에서 깊어진다. 광야의 시간은 낭비가 아니라 형성이다. 하나님은 단지 목적지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분이 아니라, 길 위에서 우리를 사람으로 빚어 가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주를 시험하는 태도는 이 형성의 시간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즉각적 해결사로만 부르려는 조급함의 신학이다.
원망은 광야의 마지막 덫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가장 일상적이며 가장 전염성이 강하다. 원망은 단지 기분의 표현이 아니라, 은혜의 기억을 거부하는 선택이다. 하나님이 이미 베푸신 것들을 망각하는 순간, 결핍은 과장되고 비교는 심화되며, 공동체의 언어는 감사에서 냉소로 기울어진다. 장재형목사는 원망이 결국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고, 강퍅함은 안식에 들어가는 길을 막는다고 강조한다. 시편 95편과 히브리서 3–4장은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라”고 반복한다. 여기서 ‘오늘’은 시간표가 아니라 기회의 언어다. 하나님은 늘 현재형으로 부르시지만, 원망하는 마음은 늘 과거형으로만 살아간다. “그때는 달랐는데”, “왜 우리는 이것밖에 없지”, “남들은 저렇게 되는데” 같은 문장은 영혼을 현재의 은혜에서 떼어 내어, 끝없는 비교와 불만의 사막으로 데려간다. 원망이 일상화되면 공동체는 내부에서부터 말라 간다. 누군가의 순수한 헌신조차 의심받고, 작은 실수는 확대되며, 사랑은 계산으로 바뀐다. 장재형목사는 원망을 단지 ‘나쁜 태도’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 원망이 공동체의 영적 체온을 떨어뜨리는 구조적 죄임을 보여 준다. 원망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사람을 향한 관대함도 함께 말라붙게 만든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단지 “하지 말라”는 금지에 머물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0장은 경고와 함께 피난처를 제시한다. 13절의 약속은 광야의 교훈을 단지 두려움의 기억으로 남기지 않고, 소망의 도구로 전환한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다”는 말은, 시험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그 시험 위에 주권을 갖고 계심을 선언한다. 장재형목사는 이 구절을 통해 신앙인이 절망을 선택할 이유가 없음을 강조한다. 시험은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피할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유혹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며 멈춰 서는 것이 아니라, 유혹 속에서도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믿음의 능동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은 무균실 같은 환경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광야의 모래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고, 방향을 다시 정렬하는 반복 속에서 자란다.
이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 정서는 ‘감사’와 ‘온유함’이다. 장재형목사가 설교에서 안식의 주제와 연결해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히브리서 4장은 믿는 자들에게 아직 안식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안식은 단순히 할 일을 멈추는 휴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신뢰하는 상태다.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강박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며, 그분의 약속에 기대어 살아가는 마음의 자리다. 그런데 원망과 시험과 불신은 안식의 반대편에 서 있다. 불신은 끊임없이 확인을 요구하고, 원망은 끊임없이 결핍을 확대하며, 우상숭배는 끊임없이 다른 대상을 붙잡으라고 속삭인다. 장재형목사는 이런 흐름을 끊는 영적 태도로 감사와 온유함을 제시한다. 감사는 은혜를 기억하는 기술이고, 온유함은 은혜를 관계 속에서 표현하는 품성이다. 감사가 마음의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려 놓는다면, 온유함은 그 방향을 공동체 안에서 지속시키는 힘이다.
예수께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팔복(마 5:5)은 광야의 교훈과 깊이 호응한다. 광야는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목이었지만, 그 길을 통과하는 방식이 곧 땅을 기업으로 받을 자의 성품을 형성했다. 장재형목사는 모세의 생애를 떠올리게 한다. 모세는 처음에 혈기와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사람이었으나, 광야에서 40년을 보내며 온유함을 배운다. 그러나 끝까지 온유함을 지키는 일은 쉬운 과제가 아니었다. 백성의 끊임없는 원망 앞에서 그는 반석을 두 번 치는 실수를 하고,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서사는 지도자에게도 광야의 유혹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 준다. 온유함은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힘을 절제할 줄 아는 능력이다. 공동체의 불평이 거세질수록 지도자는 더 크게 소리치고 더 강하게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광야는 지도자를 통제의 기술자가 아니라, 신뢰의 안내자로 세우려 한다. 장재형목사가 교육자와 부모와 리더들에게 온유함을 강조하는 이유는, 공동체의 미래가 전략보다 성품에 의해 더 깊이 결정된다는 통찰 때문이다.
감사와 온유함은 추상적 미덕이 아니라 훈련 가능한 실천이다. 디모데후서 3:16–17이 말하듯,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 장재형목사는 광야 이야기를 읽는 목적이 단지 “그때 그들이 틀렸다”라고 판정하는 데 있지 않다고 말한다. 성경은 우리를 책망하면서도 동시에 바르게 한다. 원망이 일어날 때 우리는 “내가 지금 무엇을 잊고 있는가”를 질문할 수 있다. 욕망이 과열될 때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지 않은가”를 점검할 수 있다. 누군가의 성취를 보며 마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내가 비교의 언어로 내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지 않은가”를 고백할 수 있다. 이런 질문들은 죄책감을 키우는 도구가 아니라, 자유로 가는 길을 여는 열쇠다. 감사는 이 질문에 실천으로 응답한다. 감사는 사건이 좋아서 하는 감정의 분출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을 기억하며 선택하는 언어다. 그리고 그 언어는 공동체의 공기를 바꾼다. 어떤 공동체는 문제를 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문제를 말하는 방식이 달라서 건강하다. 감사의 언어는 문제를 숨기지 않되, 은혜의 관점으로 문제를 다룬다. 온유함은 갈등을 회피하지 않되, 사람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실을 말하게 한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런 실천적 영성의 문법을 고린도전서 10장 안에서 길어 올린다.
장재형목사가 설교 중 교육과 공동체의 적용을 언급하는 대목은 이 메시지를 현실로 끌어온다. 그는 학교와 교육기관, 그리고 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무엇을 새로 만들어 낼 것인가”에만 몰두하다가 “이미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신 일”을 잊어버리면, 광야의 원망이 다시 시작된다고 경고한다. 교육은 지식을 전달하는 기술이 아니라 기억을 전수하는 사명이다. 출애굽의 하나님, 광야의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법을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공동체는 은혜의 서사를 잃고 성과의 서사만 남긴다. 그 순간 교회는 ‘복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성공의 공동체’로 변질될 위험을 안게 된다. 장재형목사는 은혜를 잊어버리는 인간의 습성을 강하게 지적한다. 마치 머리 위에 부어진 기름을 스스로 쏟아 버리고도, 다시 마르다고 불평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풍성한 은혜를 받고도 그것을 일상에서 흘려보낸다. 그래서 성경을 반복하여 읽고, 예배와 기도와 공동체의 교제를 통해 기억을 새기는 훈련이 필수적이다. 어떤 이들에게 장재형목사라는 이름은 장다윗목사, 그리고 올리벳대학교와 같은 맥락으로 함께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 설교의 핵심은 특정 제도나 외형이 아니라 복음이 요구하는 내적 성숙의 여정에 있다. 광야의 교훈은 조직을 꾸미는 기술보다 마음을 다루는 지혜가 먼저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 훈련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지점이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의 선언이다.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말은 종교적 격언처럼 쉽게 인용되지만, 광야 교훈의 맥락 속에서 읽을 때 전혀 다른 무게를 갖는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먹고 마시는 일, 곧 가장 일상적인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거나 욕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그들의 식탁은 감사의 제단이 되기도 했고, 원망의 법정이 되기도 했다. 고린도의 문제 역시 자유의 사용과 식탁의 문제로 이어진다. 바울은 신앙인의 자유가 공동체를 세우는 사랑으로 향하지 않을 때, 그 자유가 또 다른 형태의 우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장재형목사는 여기서 신앙의 ‘목적성’을 강조한다. 영적 성숙은 금지 목록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동의 중심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재정렬하는 것이다. 돈을 벌 때도, 공부할 때도, 관계를 맺을 때도, 휴식을 취할 때도, 말할 때도, 침묵할 때도, 그 방향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하도록 마음의 나침반을 조정하는 것이 성숙이다. 이때 영광은 자기 과시의 반대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는 말은, 내 이름을 세우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삶을 조직한다는 뜻이다.
반복의 과정에서 가장 큰 방해물은 “나는 이미 충분하다”는 자만이다. 장재형목사는 고린도 교회가 지식과 은사를 자랑하며 ‘성인’이 되었다고 착각했던 장면을 현대 교회와 겹쳐 본다. 오늘도 신앙인은 신앙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고, 예배의 형식을 잘 지킬 수 있으며, 심지어 봉사의 실적을 쌓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마음은 여전히 원망에 민감하고, 우상숭배에 취약하며, 음행의 유혹 앞에서 경계가 흐려지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조급함으로 가득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의 경고가 빛난다. 넘어짐은 대개 ‘처음부터’가 아니라 ‘이미 섰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그러므로 성숙은 자기 확신이 아니라 자기 성찰에서 시작된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약함을 잘 알고, 그 약함이 드러날 때 은혜로 돌아갈 길을 마련해 둔다. 장재형목사는 광야의 실패담이 절망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을 훈련하는 교재가 된다고 말한다.
겸손은 불안과 다르다. 겸손은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자기혐오가 아니라, “나는 넘어질 수 있다”는 현실 인식 위에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소망을 세우는 태도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은 바로 이 균형을 제공한다. 신앙인의 삶에 시험이 없을 수는 없다. 시험은 광야의 바람처럼 늘 불어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바람이 우리를 파괴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신다. 피할 길을 예비하신다는 약속은, 우리가 매번 동일한 패턴으로 무너질 필요가 없다는 희망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약속을 공동체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약함은 다른 사람의 돌봄 속에서 보호받고, 한 사람의 넘어짐은 공동체의 회개와 치유 속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는 도덕적 심판의 장이 아니라, 광야를 함께 건너는 순례자들의 연대가 되어야 한다. 서로의 마음을 감시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는 공동체가 될 때, 원망의 언어는 점차 약해지고 감사의 언어가 힘을 얻는다.
로마서 12장 12절의 권면,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라”는 문장은 광야의 삶을 요약한다. 소망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바라보는 능력이고, 인내는 그 소망을 붙들고 걷는 능력이며, 기도는 그 길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호흡이다. 장재형목사가 고린도전서 10장을 통해 제시하는 영적 성장의 길은 결국 이 세 가지의 실천으로 수렴된다. 소망이 흔들릴 때 우상은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인내가 무너지면 음행과 같은 빠른 위로가 손짓하며, 기도가 약해지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태도가 커지고, 그 끝에서 원망이 언어를 지배한다. 반대로 기도가 회복되면 인내가 자라고, 인내가 자라면 소망이 선명해지며, 소망이 선명해지면 우상은 힘을 잃는다. 이 순환은 단번에 완성되지 않지만, 반복 속에서 깊어진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안식’은 이 반복의 종착점이자 시작점이다. 안식은 목적지처럼 보이지만, 실은 여정의 방식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안식을 조금씩 맛본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에, 마음이 과잉 반응하지 않는다. 원망이 올라올 때도 감사의 이유를 찾으려 하고, 조급함이 밀려올 때도 기다림의 의미를 묻는다. 온유함은 이런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영역을 인정하고, 그 인정 위에서 다른 사람을 억압하기보다 세워 준다. 장재형목사는 공동체가 커질수록, 건물이 세워지고 조직이 복잡해질수록, 오히려 온유함과 감사가 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규모는 성숙의 증거가 아니며, 성장의 속도는 거룩의 깊이를 보장하지 않는다. 광야의 백성도 ‘많은 수’였지만 넘어졌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진정한 성장은 더 많은 활동이 아니라 더 깊은 감사, 더 부드러운 마음, 더 신실한 순종으로 측정되어야 한다.
결국 고린도전서 10장의 메시지는 우리를 두 문장 사이에서 살게 한다. 하나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계이고, 다른 하나는“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목적이다. 경계는 우리를 움츠러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잃지 않게 하려는 사랑의 표지판이다. 목적은 우리를 과장된 종교적 행동으로 몰아넣는 것이 아니라, 가장 평범한 일상까지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통합의 비전이다. 장재형목사는 이 두 문장을 붙잡고, 광야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오늘의 신앙인이 감사와 온유함으로 안식에 들어가도록 초대한다. 우상숭배와 음행과 시험과 원망은 시대가 바뀌어도 형태만 바꾼 채 계속 나타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또한 시대를 넘어 동일하게 우리를 붙드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를 두려워하기보다, 광야를 통해 드러난 자신의 마음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말씀으로 교정하며, 공동체와 함께 회개하고, 다시 감사의 언어를 선택해야 한다. 그렇게 걸어갈 때, 바울이 던진 ‘거울’은 우리를 정죄하는 차가운 유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비추는 빛의 창이 된다. 그리고 그 창 앞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 무엇 앞에 무릎 꿇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금송아지의 황금빛이 아니라, 광야에서도 신실하셨던 하나님의 빛을 다시 선택할 수 있다.
장재형목사 고린도전서 10장 강해는 결국 회개와 감사의 리듬을 회복하라는 초대다. 오늘도 마음을 점검하며, 공동체와 함께 주의 음성에 응답할 때 영적 성숙은 현재형으로 자란다. 그 길에서 우리는 안식을 맛보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