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의의 무기로 드려지는 성도의 삶

1.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믿음 

로마서 6장은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는 과정, 즉 칭의(稱義), 성화(聖化), 영화(榮化)의 큰 흐름 가운데 ‘성화’라는 지속적 변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이 장(章)에서 “죄에 대하여 죽었으니,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 가운데 거할 수 없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원리를 집중적으로 해설한다. 이를 통해 “의의 무기로 너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핵심 교훈이 제시되는데, 이는 칭의 이후의 삶, 곧 성화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실제적인 지침이 된다. 오늘날 많은 성도가 로마서6장을 읽으며 ‘은혜 아래 있으니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지 않을까?’라는 오해를 품을 수 있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라고 단호하게 선포한다. 죄와 은혜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면 신앙의 타락과 방종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러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전에, 신학적으로 흔히 말하는 구원의 세 단계, 곧 칭의-성화-영화가 무엇인지 간략하게 정리하겠다. 첫째, 칭의는 우리 안에 단번에 일어나는 ‘신분의 변화’다. 장재형목사 등의 여러 설교자들이 반복해 강조해왔듯,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의롭다 함’은 우리의 원죄가 깨끗이 사해지는 사건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둘째, 성화는 칭의 이후의 ‘상태의 변화’다. 신분은 이미 의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삶의 습관과 죄성(罪性)이 우리 몸에 남아 있기에, 그 상태를 점진적으로 거룩하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셋째, 영화는 마지막 날 주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몸과 영이 온전해져 더 이상 죄가 틈타지 못하는 최종적 구원의 상태다. 영화에 이르기 전까지, 신자는 성화의 길을 걸으면서 죄와 싸우고 거룩함을 향해 성장해간다.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어떻게 다시 그 죄 가운데 거하겠느냐”라는 강력한 반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어서 세례를 예로 들어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교리를 설명한다.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대표이론(아담과 그리스도의 대조)을 펼치다가, 6장에 이르러서는 ‘연합 이론’을 강조한다. 대표이론은 죄가 아담에게서 온 것처럼, 의는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에게 전가된다는 논리이고, 연합 이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분과 함께 죽고 살게 된다는, 매우 인격적이고 긴밀한 결합을 의미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곧 나의 죽음이고 그분의 부활이 곧 나의 새 삶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 증표로 ‘세례’를 말하며, 물세례와 성령세례 모두를 염두에 두면서 “너희가 이미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선언을 한다.

바울이 말하는 세례에는 구약적인 뿌리가 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이 물로부터 구원을 받은 사건, 그리고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애굽의 추격을 떨쳐버린 사건이 그 예다. 죄악의 세상에서 벗어나 구원받은 모습이 물을 통과하는 사건으로 상징된다는 것이다. 신약시대에도 세례는 죄로부터 단절되어 새 출발한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증하는 의식으로 이어지는데, 바울은 이것을 한층 더 깊이 있게 설명한다. 곧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는‘시각적 상징’이며, 이미 마음으로 성령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한 자들이 물로 상징되는 예식을 통해 공적으로 고백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장재형목사 역시 여러 설교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것이 세례의 핵심적 의미”임을 즐겨 강조해왔다.

바울은 로마서 6장 1-11절에서 주로 우리의 신분과 위치가 이미 변화되었음을 논증한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죽은 자”라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라는 사실이 선언된다. 칭의가 이렇게 단번에 우리의 구원 문제를 해결한다면, 이제 성화의 과정에서 우리가 계속 직면하는 싸움은 무엇인가. 바울은 12절 이하에서 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우리가 이미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죽을 몸을 입고 살아가기 때문에 죄가 육신의 약점을 통해 침투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경고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아담으로 대표되는 죄의 세력 아래 놓여있었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있다. 신분은 바뀌었으나, 실제 삶의 현장에서는 여전히 죄가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말이다. 바울은 “몸의 사욕”을 경계하라고 한다. 선한 욕망과 필요가 죄의 통로가 되어버리면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미 은혜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로마서 6장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라”고 말한다. 예수를 믿는 순간 우리의 소유권은 사단에게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옮겨졌다. 마치 법률적 절차를 거쳐 소유권이 완전히 이전된 것과 같다. 그러므로 죄가 불법 침입자이며,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사단에게 내가 속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자각으로 맞설 수 있다. 바울은 그 자각이 없다면, 즉 자신이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죄에 휘둘리기만 한다면, 이미 얻은 구원의 확증을 누리지 못하고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장재형목사 또한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는 사단을 향해 명령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점을 여러 예화로 설명해왔다. 예컨대 마가복음5장의 거라사 광인에게서 귀신이 예수를 알아보고 떨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더 이상 죄나 귀신이 합법적으로 거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이 은혜 아래 있는 자의 특권이며 담대함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바울이 다시금 ‘은혜를 죄 짓는 기회로 삼는 일’에 대해 강력한 경고를 덧붙인다. “은혜가 크니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되지 않느냐?”라는 질문에 “그럴 수 없느니라”고 선을 그어버린다(롬 6:15). 우리의 자유는 죄를 마음대로 방치할 자유가 아니다. 바울이 “죄에게 너희 지체를 종으로 내주면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은, 실질적 삶의 차원에서 우리 몸을 어떤 주인에게 맡기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뜻이다. 신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의 종살이에서 풀려났으니, 다시 죄의 종으로 돌아갈 이유가 전혀 없다. 대신, 의의 종이 되어 우리 지체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에 드려야 한다.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우리의 몸과 시간, 재능, 생각, 의지 등 모든 지체가 어디에 소속되어 쓰임받는지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결국 로마서 6장 1-14절에서 강조되는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죄에 대해 죽은 자이며, 실제로 세례라는 예식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고백을 했음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 이미 구원받아 신분이 바뀌었으나, 죽을 몸을 통해 여전히 죄가 들어오려 하므로 경계하라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은혜 아래 있으므로 사단이 합법적으로 우리를 주장할 수 없으나, 우리가 방심하여 죄를 내 몸 안에 초청한다면 죄의 종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바울은 신자에게 “은혜 아래 거하되 죄를 지배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도전한다. 장재형목사 또한 설교에서 “칭의가 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면, 성화는 매일의 전투”라고 강조한다. 우리는 구원 이후에도 계속해서 자범죄와 싸우며, 옛 성품이 남긴 ‘구습’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훈련을 해야 한다.

여기서 “몸의 사욕을 지배하라”는 요구는 단순한 금욕주의가 아니다. 몸 자체를 죄악시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바울의 가르침은 영지주의적인 ‘육체 멸시’와 다르다. 그는 고린도전서 6장이나 에베소서 5장 등에서 계속해서 “몸은 성령의 전이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임을 말한다. 문제는 그 몸을 죄에게 내어주느냐, 혹은 하나님께 내어드리느냐이다. 우리 몸의 지체, 곧 눈·입·귀·손·발·생식능력 등을 어디에 쓰느냐가 중요하다. 장재형목사 역시 이 부분에서 “세상에 살아가면서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이 모두 달라져야 한다. 이것이 성화의 과정”이라고 자주 역설한다. 눈길 하나, 생각 하나가 결국 몸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눈으로 음란한 것을 즐겨 보면 마음에 욕망이 커지고, 결국 몸이 죄의 지배를 받게 되어버린다. 반대로 말씀과 기도에 우리의 눈과 귀를 열면, 몸이 점점 하나님께 순종하는 쪽으로 변한다. 그렇게 의의 무기로 드려지는 몸이 성화를 이루어가는 실제적 길이다.

바울은 그 과정에서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요한복음 17장 17절을 인용하며, “진리로 거룩하게 되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고 말할 수 있다(요 8:32). 진리가 우리 안에 확실해질수록, 죄를 향한 마음의 문을 닫게 되고, 하나님께 몸을 드리는 예배와 섬김이 기쁨이 된다. 이는 결코 억지로 끌려가는 노예근성의 순종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기쁨으로 드러나는 순종이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마음으로 순종”하는 모습이며, 율법 아래 매여 하는 순종과는 전혀 다르다. 장재형목사 또한 “성령께 사로잡힌 사람은 기쁨으로 주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며, 억압이 아닌 은혜에서 나오는 순종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우리가 정리할 핵심은 이렇다. 첫째,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자로서, 죄에 대해서는 이미 단번에 죽었음을 인식해야 한다(칭의의 확실성). 둘째, 그러나 현실적으로 죽을 몸을 지닌 우리에게 죄는 계속해서 공격해오므로, 몸의 지체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노력이 필요하다(성화의 과정). 셋째, 우리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의 세력이 합법적으로 우리를 지배할 수 없으나, 방심하면 얼마든지 죄가 불법 침투할 수 있다. 넷째, 은혜를 함부로 악용하지 말고, “더 이상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는다”는 자유와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구원받은 성도는 실제적인 삶에서 점차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2. 의의 종이 되어 맺는 열매 

로마서 6장 15절부터 23절까지는, 앞서 바울이 선언했던 “은혜 아래 있다”는 자유가 결코 방종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고, 더욱 구체적으로 ‘죄의 종’과 ‘의의 종’을 대조해 보여주는 부분이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된다”(롬 6:16)는 말은 당시 로마 사회에서 노예제도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매우 직접적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노예는 단 한 주인에게만 속하며, 자신이 속한 주인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몸을 죄에게 내어주면 죄의 종이 되고, 의에게 내어주면 의의 종이 된다. 중립은 없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자가 “죄를 짓느냐, 의를 행하느냐”의 문제는 단순히 작은 도덕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의 소유가 되어 누구에게 순종하느냐의 문제다.

장재형목사가 누차 설교에서 예화로 드는 것처럼, “주인과 종”이라는 이미지는 굉장히 강렬하면서도 관계의 본질을 알려준다. 종(奴僕)은 주인의 말을 거역할 자유가 없다. 세상 노예제도는 종에게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삶을 강요했을 수 있으나, 성경에서 말하는 “의의 종” 개념은 전혀 다르다. 구원받기 이전에는 죄의 종으로 살면서, 원치 않는 죄의 결박 속에 빠져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은혜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었다. 바울이 17절에서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의의 종이 되었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사랑과 감사 속에 스스로를 하나님께 드린다. 억지로 구원받은 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듣고 깨닫고 마음으로 믿어 자발적으로 된 하나님의 종인 것이다.

이 말은 곧, “의의 종”이란 신분은 강요된 노예 상태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헌신적 순종을 의미한다. 또 바울은 바로 그 ‘의의 종’의 삶에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가 나오게 된다고 강조한다(롬 6:19, 22). 죄의 종으로 살면 계속해서 부끄러운 열매만 쌓여 결국 사망(죽음)에 이르고, 의의 종으로 살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그 마지막에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롬6:21-23). 이렇게 인생의 두 길을 대비함으로써, 바울은 신자에게 분명한 길을 제시한다. 이미 죄에서 해방된 자로서, 왜 다시 죄의 노예로 돌아가겠느냐? 차라리 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축복을 누려야 한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바울은 19절에서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한다”고 한다. 노예 개념을 예로 든 것은 그만큼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곧바로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고 한다. 바울은 우리의 지체를 죄에 내주면 부정(不淨)과 불법(不法)이 더 심화되어 최종적으로 파멸의 길로 가지만, 의에게 내주면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부정’은 더러움, 곧 마음과 생활이 더러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불법’은 죄책과 불의함으로 율법을 깨뜨리는 상태다. 죄는 그렇게 사람을 더욱 비참하고 속박된 상태로 이끈다. 그러나 의에게 내어주면, 즉 믿음으로 “나는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실제 삶에서도 하나님 뜻에 순종하기 시작하면, 우리 안에 점점 더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쌓여간다.

누구도 순간적으로 완벽해지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성화의 과정은 치열한 영적 전투이며, 말씀과 기도, 공동체의 교제를 통해 계속해서 몸을 훈련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실패도 경험한다. 그러나 차이가 있다면, 죄의 종이었을 때는 우리의 실패가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었다면, 의의 종이 되었을 때는 실패하더라도 다시금 회개하여 일어날 수 있고, 그 과정을 통해 더 깊은 거룩을 배우게 된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9장의 나면서부터 맹인 된 자가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요 9:3)”고 하셨듯, 오늘날 우리의 연약함과 실패가 오히려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통로가 될 수 있다. 장재형목사도 여러 차례 인용하는 이 본문은, 과거의 죄책과 짐에 스스로를 묶어 두기보다는 ‘미래에 베푸실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라는 신앙의 핵심을 보여준다. 신자의 시선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있다. 우리는 이미 칭의를 통해 죄 문제를 단번에 해결받았고, 이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날마다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성화의 길을 걷는다. 그 궁극적 완성은 영화, 곧 죽음조차 더 이상 우리를 결박하지 못하는 영원한 생명 안에서 찾게 된다.

바울은 21절에서 “너희가 그때에(죄의 종이었을 때)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라”고 지적한다. 죄된 과거의 삶을 떠올려보라는 것이다. 순간의 쾌락과 이익이 있을 수 있지만, 결국에는 후회와 파멸을 가져다준다. 신앙 없이 사는 사람도 스스로 ‘양심의 법’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난 뒤에는 공허감과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이 습관화되면 점점 더 큰 죄에 빠진다.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 하는데, 바울은 이것을 군인의 품삯(wage)으로 비유했다. 당시 헬라어로 ‘옵소니아(ὀψώνια)’라는 단어는 군인이나 노예가 땀 흘려 일한 대가로 받는 정당한 임금을 가리킨다. 문제는 죄의 대가로 받는 임금은 ‘사망’이라는 사실이다. 즉, 죄에 애써 헌신한 자가 받을 삯은 결국 영적 죽음,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절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덧붙인다(롬 6:23). 여기서 ‘은사(恩賜)’는 헬라어로 ‘카리스마(χάρισμα)’인데, 자격이나 공로 없이 베풀어지는 선물을 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황제가 은혜로 백성들에게 큰 축제나 날에 하사품을 나눠주듯이,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이다. 그 선물의 내용이“영생”이다. 죄의 종으로 있으면서 받는 임금이 사망이었다면, 의의 종이 되어 받는 선물은 영생이다.

이처럼 인생에는 결국 두 길이 존재한다. 죄에 종속된 자로 살다가 죽음에 이르느냐, 의에 종속되어 영생에 이르느냐이다. 바울은 이미 로마서 5장에서 “한 사람 아담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지만, 또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의와 생명이 임했다”고 말하며, 우리에게 새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소개했다. 로마서 6장에서는 그 은혜로 구원받은 자들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죄와 맞서 싸우고 성화의 길을 갈 것인지를 안내한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한 많은 설교자들이 강조하듯, 신앙의 목적은 단지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녀로서 이 땅에서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다가, 최종적으로 영생에 이르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삶에 깊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한다. 세상의 만족이나 쾌락은 일시적이고,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의 종으로서 맺는 열매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하늘에 쌓인다(마 6:20).

그렇다면 의의 종으로서 우리가 실제 삶에서 해야 할 태도는 무엇인가? 첫째, 날마다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죄가 육신의 약점을 통해 침투하려고 하는 이 현실에서, 말씀은 우리 영혼을 지켜주는 강력한 무기다. 둘째,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님조차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으니, 우리가 시험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하며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치셨고, 기도로 깨어 계심으로써 끝내 승리하셨다. 셋째, 우리 몸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실천이 필요하다. 바라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활동하는 모든 면에서 “이것이 지금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적 순종인가?”를 점검해야 한다. 욕망 자체는 결코 악한 것이 아니지만, 죄가 그 욕망을 왜곡시키지 못하도록 경계해야 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0-19절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한다. 이는 곧 죄와 맞서 싸우는 영적 전쟁을 준비하라는 것이다. 신발 신는 것, 갑옷을 입는 것, 방패와 투구를 장착하는 것, 그리고 말씀의 검을 드는 것 모두가 우리의 실제 전투태세를 상징한다. 마찬가지로 로마서 6장에서 바울은 신자를 향해 “의의 무기가 되라”고 요청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의 몸과 삶이 하나님의 정의, 사랑, 거룩을 드러내는 무기가 되라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몸을 사단에게 넘겨주면 불의한 일에 악용되지만, 하나님께 드리면 많은 생명을 살리고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축복의 통로가 된다. 장재형목사도 설교에서 “우리의 지체가 누구 손에 붙들리느냐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며, 소속과 헌신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한 바 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23절을 통해 이 모든 결론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다.” 이것은 기독교 복음의 극명한 대비이며, 궁극적 선택이다. 죄의 길은 아무리 달콤해보여도 그 끝이 사망인 이상, 신자는 굳이 그 길로 갈 이유가 없다. 반대로 의에 순종하는 길은 비록 세상 기준으로는 손해 보이는 것 같더라도, 실상은 영원한 생명과 연결된 길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와 능력으로 억지로 성취하는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라는 점이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의 할 일은 그저 “아멘”으로 받는 것이며, 받은 은혜에 합당하게 몸을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로마서 6장 전체의 맥락을 종합해보면, 우리가 죄 가운데 오래 있을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가 우리를 옛 종살이로 끌고 가려 할 뿐이다. 신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위해 자신을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 한다. 죄를 극복하는 힘은 율법의 두려움이 아니라, 은혜 아래 있다는 진리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을 붙들 때, 마치 불법 거주자가 합법 권세자 앞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죄와 사단은 합법적 지위를 잃고 떠나갈 수밖에 없다. 장재형목사 또한 이 로마서 6장을 근거로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의 권세와 사랑 안에 들어왔으니, 사단은 더 이상 우리를 소유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거듭 설파한다. 문제는 우리가 종종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나는 아직도 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착각할 때 생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의 종으로서 결단해야 한다. 이미 하나님께 속한 사람답게 살겠다는 의식적 결단이 필요하다. 죄의 유혹이 찾아올 때마다 “나는 더 이상 너(죄)의 소유가 아니다”라고 선언하고,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욕망을 다스려야 한다. 동시에, 단지 죄를 이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이 되며,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모든 일이 바로 의의 종으로 살아가는 실천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날마다 구원받은 기쁨을 되새기며, 궁극적으로 영화의 날에 이르기까지 성화의 여정을 이어가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을 바라볼 때,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많은 목회자들이 강조하는 ‘칭의와 성화의 경계 혼동 금지’가 다시금 떠오른다. 칭의가 신분의 변화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성화는 삶 속에서 점진적으로 드러나는 거룩의 열매다. 칭의의 확증 위에서, 성화의 싸움을 매일 치러가야 한다. 만약 성화의 과정에서 넘어지더라도, 그것이 칭의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 시민권자로서, 아버지의 자녀로서 살아가고 있으며, 다시 회개하고 돌이키면 된다. 중요한 것은 죄에 넘어질 때마다 사단의 정죄에 묶여 “나는 끝났구나”라고 절망하지 않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붙드는 것이다. 그 위에서 다시금 하나님께 나아가고, 성령을 의지하며 앞으로 전진하면 된다.

로마서 6장은 결론적으로, 죄의 종과 의의 종의 길을 분명히 대조한다. 전자는 결국 죽음이고, 후자는 영생이다. 이미 예수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입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고 하나님께 대해 산 자이니, 우리 지체를 의의 무기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자”는 권면에 기쁨으로 동참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성화의 길이며, 우리 구원받은 자들이 누려야 할 복된 여정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 힘이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근거한 길이다. 우리는 그 은혜 안에서 담대히, 그러나 겸손히, 매일의 삶에 몸을 드리는 순종의 걸음을 걷는다.

결국 의의 종이 되는 길은 인간적 억압이 아니다. 세상 주인의 노예가 되어 무조건 굴복해야 하는 비참함과 다르다. 오히려 우리가 몸을 드릴수록 자유와 기쁨을 얻게 되는 역설이 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이라 스스로 칭하며 오직 한 분 주님만을 섬기는 기쁨을 고백한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께 온전히 사로잡힌 종”이 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길의 결론은 풍성한 열매와 영원한 생명이다. 로마서 6장이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권면으로 마무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몸을 드릴수록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고, 세상에 희망이 전해지며,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간다. 그리고 그 길을 걷는 우리 자신도 점점 더 거룩해져, 결국 하나님의 장중에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

로마서 6장은 “죄에 대해 죽은 자, 의에 대해 산 자”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실제 삶을 다루며, 동시에 “의의 종이 될 것인가, 죄의 종으로 돌아갈 것인가”라는 중대한 결단을 촉구한다. 바울은 성도를 향해 “구원은 이미 받았으니 안심하고 방종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은혜 아래 있으니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도록 치열하게 싸우며, 우리 몸을 의의 무기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고 권면한다. 장재형목사가 누차 강조해온 대로, 이 성화의 길은 매일의 순종과 결단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마지막은 영생에 이른다. 죄의 삯인 사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복음이 주는 소망이다. 아담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비참한 죄의 종살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완전히 새 길을 열게 되었다. 그 자유와 기쁨 속에, 우리 지체를 기꺼이 하나님께 드려 ‘의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로마서 6장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며, 동시에 신앙의 실제적 과제다.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해 죽었고, 은혜 안에 있으며, 이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 “그러므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내주지 말고,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이 도전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도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칭의 받은 자가 성화를 이루어가며, 장차 영화에 이를 때까지 꼭 붙들어야 할 진리이자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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